한국 여성 교육의 어머니, 김활란 박사 탄생 100주년
여자여, 배우자, 세계로 가자
글·장명수 (한국일보 주필·1964년 신문학과 졸업)

김활란은 누구인가

1999년은 한국 여성 교육의 어머니이며 이화의 큰 스승인 김활란 박사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1899년 2월 27일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 가던 조선조 말기에 태어나 군사 정부의 개발 독재가 한창이던 1970년 2월 10일 세상을 떠난 그의 생애와 업적은 21세기를 한 해 앞둔 오늘도 새롭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조선조 멸망, 36년에 걸친 일제 통치, 해방, 남북 분단, 동족 상잔의 전쟁, 학생 혁명, 군사 쿠데타 등으로 바람 잘 날 없던 격변의 세월이었다. 그 숨가쁜 역사 속에서 그는 여성 교육의 고삐를 움켜쥐고 시련 많은 길을 걸었다. 여자를 차별하는 뿌리 깊은 인습, 폐교를 위협하는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며 그는 여성의 인간화를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찬 비바람도 그가 높이 든 두 개의 깃발을 꺾지는 못했다.
그는 '기독교 신앙'과 '여성 교육'이라는 복음을 한평생 전도했다. "당신의 생에 하나님을 영접하십시오"라는 말과 "여자여, 배우자, 세계로 가자!"는 말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평등과 사랑을, 교육은 평등과 사랑으로 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김활란을 봉건 사회의 굴레에서 구해 준 것도 신앙과 교육이었다. 그는 자신이 구원받은 길로 더 많은 여성들을 이끌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는 교육자로서뿐 아니라 기독교 지도자, 사회 운동가, 외교 대표로도 이름을 날렸다.
신교육을 받은 인재,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부족하던 시절 그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어디나 달려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승인받아야 했던 파리 유엔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것을 비롯, 유엔총회에 6번, 유네스코 회의에 3번 한국 대표로 참가했고, 대통령 특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일생 동안 56회의 각종 국제회의에 참가했을 만큼 왕성한 해외 활동을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어둡던 시대에 희망의 등불을 들고 앞장서서 걸어간 선각자였다. 그는 한국 최초의 여자 박사였고, 처음으로 트레머리를 잘라버린 단발 여성이었고, 결혼 대신 일을 선택한 당당한 독신 여성이었다. 1928년 예루살렘 기독교 회의에 참석하러 출국했던 그는 여행중 사이공 항구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불결한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짐을 나르는 것을 본 후 인습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깨닫고 자신의 긴 머리를 잘라 버리고 귀국하여 온 나라를 놀라게 했다. 서양에서도 여자의 쇼트 컷이 드물던 시절, 단발머리로 인습 타파와 생활 개혁을 역설하는 김활란은 신문화, 신교육, 신여성의 상징이었다.
1931년 미국 콜럼비아대학에서 「한국의 부흥을 위한 농촌 교육」이란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음으로써 그는 한국 최초의 여자 박사가 되었다. 여자가 박사가 되었다는 소식은 일제의 억압에 신음하던 나라를 기쁨으로 들뜨게 했다. "나도 김활란처럼 훌륭한 여자가 되겠다. 내가 김활란처럼 될 수 없다면 내 딸을 그렇게 키우겠다"는 열망이 여자들의 가슴에 샘솟았다. 김활란이란 이름은 한 시대의 여성들에게 위안과 희망과 각성을 준 이름이었다.

어머니 박또라, 그 시대의 여인들

김활란은 제물포 배다리마을(현재 인천시 우각동)에서 김진연(金鎭淵)·박또라(朴萄羅) 씨의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899년이 기해년이었으므로 부모는 기득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여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름이 없던 시절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딸들에게도 이름을 지어 줄 만큼 개화한 분들이었다. 그가 일곱 살 때 인천의 내리교회에서 온 가족이 세례를 받으면서 어머니는 또라, 딸들은 엘렌·마리온·헬렌 등의 세례명을 갖게 됐고, 아버지가 세례명에 한자를 달아 애란·활란 등의 새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기득·헬렌·활란 등 3개의 이름을 갖게 됐다. '또 하나의 달'이란 뜻의 우월(又月)은 형부인 김달하(金達何)씨가 지어 준 아호다.
평북 의주에서 농사를 짓던 김진연씨가 인천으로 이주한 것은 새 삶을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쇄국 정책을 고집하던 대원군이 1873년 실각하자 고종은 3년 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1882년에는 미국·영국·독일과 수호 조약을 맺었다. 부산·원산·인천이 잇달아 개항하고, 해외 문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 항구들은 활기가 넘치는 기회의 땅이 되었다. 김진연씨는 인천의 큰 상점에서 경리일과 창고업을 돕고 있었다.
어머니 박씨도 평북 의주 태생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노름 빚에 몰린 아버지는 열 살이 갓 넘은 딸을 부잣집에 팔아 넘겼다. 그가 팔려 가던 날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 있던 그의 어머니는 갑자기 들이닥친 사내들이 발버둥치는 어린 딸을 끌고 가 버리자 베를 모두 찢어 버리고, 그 길로 자리에 누워 애통해하다가 곧 세상을 떠났다. 가난과 무지가 부른 비극이었다.
팔려 간 달이 6월이어서 그는 '유월이'라고 불렸다. 총명하고 인물이 환해서 '함박꽃'이란 별명도 얻었다. 틈틈이 글을 배운 그는 그 댁 마님의 시중을 들면서 온갖 옛이야기 책을 읽어 드리곤 했다. 그가 열여덟살 때 주인 영감은 그를 소실로 삼았다. 딸을 둘 낳고 의식주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는 차츰 사람의 도리를 생각하게 됐다. 소실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결심이 서자 그는 붙잡는 주인집 사람들을 뿌리치고 어린 두 딸과 함께 그 집을 나왔다. 생계가 막막했으나 그의 결심을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그 때 김진연 씨는 첫 아내와 사별한 후 아들 하나와 인천에서 살고 있었다. 고향 사람의 중매로 그들은 혼인하여 2남 3녀를 낳았다. 전실 아이들을 합쳐 모두 3남 5녀를 거느린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떳떳한 새 삶이었다.


이화학당의 장학생들(1911).
대학과의 윤심성, 김메레(뒷줄 왼쪽부터)등
상급생들과 함께 이화학당의 장학생으로
선발된 12세의 김활란 선생님(오른쪽 끝)

미신을 좋아하여 길흉화복을 귀신에게 의지하던 어머니는 어느 날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가진 전도 부인 김씨를 만났다. 그가 기독교를 전도하자 어머니는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하나님 안에서 그의 과거와 미래는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옳다고 판단하면 과감하게 받아들이는 결단력을 가졌던 그는 남편을 설득하여 온 가족을 이끌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막내딸을 특히 사랑했고 "헬렌을 하나님께 바치오니 하나님께 합당한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늘 기도했다.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면서 '하나님께 합당한 그릇'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어린 헬렌의 가슴을 채웠다.
여자를 가문의 종속물로 보는 유교 전통 아래서도 조선조 양반 계급의 여인들은 안주인으로서 당당한 지위를 가졌고, 높은 규방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한국 개화기의 선각자들.
왼쪽부터 황애덕, 최용신, 김활란 선생님. 한국 지식 여성 1세대인 이들 세 여성은 교육과 농촌 계몽을 통해 민족을 깨우치며 한국 근대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이어져 내려오는 한 집안의 가풍을 유지하고, 여인으로 살아가는 법도와 예절을 높이 세우고, 학문과 서화를 배워 깊은 경지에 이르기도 했다. 기생들조차 기예와 시문의 풍류를 즐길 줄 알았고, 빼어난 시와 그림들을 남겼다. 그러나 아래 계층의 여자들은 고단한 운명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가난과 무지, 야만과 폭력이 삶을 억누르고 있었다.
열네살의 김활란은 이화학당 기도실에서 밤새워 기도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처절한 울부짖음과 함께 "저 소리가 들리느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저 소리는 한국 여성들의 아우성이다. 저들을 구해야 한다. 그것이 너의 일이다"라고 그 음성은 말했다. "나는 땀에 흠뻑 젖어 흐느껴 울면서 뚜렷한 목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그는 훗날 고백했다. 그의 생에서 결정적인 전기가 된 그 계시의 경험, 어둠 속에서 들려온 소리는 어머니와 그 시대 여인들의 한맺힌 울부짖음이었다.
가난 속에서 하숙을 치고 남의 집 일을 도우면서도 어머니는 자녀들을 학교에 보냈고, 특히 세 딸을 이화학당에 보내면서 그들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을 빌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딸들에게 "오늘은 무엇을 배웠느냐"라고 묻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양반 계급 출신이 아니었던 그는 강한 생명력과 자유로운 개척 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그는 일제시대에도 나라를 위한 기도를 잊지 않았고, 고리짝 깊숙이 태극기를 간직했다가 해방되던 날 마을 젊은이들에게 내주어 태극기를 그릴 수 있게 했던 여장부였다. 여자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꾸며 역경 속에서도 딸들을 훌륭하게 키웠던 한국의 어머니, 박또라 여사는 1954년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화와의 만남

1883년 9월 미국 오하이오 주의 작은 도시 레벤나에서 감리교 여자 선교사들의 모임이 열렸을 때 한 노부인이 한국에서 선교해 줄 것을 부탁하며 적은 돈을 헌금했다. 중국과 일본에서의 선교를 논의하던 감리교 선교회는 그 일을 계기로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됐고, 한국에 보낼 선교사로 메리 F. 스크랜턴 부인과 그의 아들이며 의사인 윌리엄 B. 스크랜턴, 헨리 G. 아펜젤러 목사를 선정했다. 그들은 장로교에서 파견하는 호레이스 G. 언더우드 목사와 함께 1885년 2월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났다.


농촌 계몽에 참가하고 있는 김활란 선생님(1930).
농촌소설 <상록수>의 실제 현장인 '샘골'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그들은 서울 정동에 자리잡고 학교와 병원을 열었다. 아펜젤러 목사는 1885년 8월 배재학당을, 스크랜턴 부인은 1886년 5월 이화학당을 시작했다. 동네마다 서당 중심으로 남자아이들에게 한학을 가르치고, 여자들은 집에서 어깨 너머로 한글을 배우던 시절, 서양인들에게 아이를 맡기려는 부모는 없었다. 더구나 딸을 집 밖에 내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888년에는 서양인들이 어린이를 잡아먹는다는 유언비어가 돌아서 이화학당을 한 달 동안 휴교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화학당 초기의 학생들은 버려진 아이들과 가난한 집 아이들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스크랜턴 부인은 사고무친인 학생들이 죽었을 때 묻어 주기 위해 마포 부근에 학교 묘지를 마련하기까지 했다.
1908년 아홉 살의 김활란이 이화학당에 입학하던 해 이화는 개교 22주년을 맞고 있었다. 학교는 차츰 자리가 잡혀서 1904년 중등과, 1910년 대학과를 설치하고, 1908년부터는 수업료를 받을 만큼 학생 확보에도 여유가 있었다. 작은 키에 희고 동그란 얼굴, 밝고 편안한 성격을 가졌던 김활란은 곧 선생님들의 사랑과 기대를 모으게 됐다. "너는 나에게 가르치는 기쁨을 알게 해 주는구나"라고 서양 선교사들은 그를 칭찬하곤 했다.
1918년 대학과를 졸업한 그는 중등과 교사로 4년 동안 후배들을 가르치다가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오하이오 웨슬레안대학 3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보스턴대학 대학원에서 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때부터 그는 각종 기독교 회의 등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28년 미국 감리교회 총회에서 불경기로 선교 사업을 축소하면서 한국 교구를 일본에서 관할하기로 결정했는데, 긴급 발언을 신청한 김활란이 열렬한 일장 연설을 편 끝에 앞의 결정을 번복시킨 일이 있었다. 그 회의를 계기로 헬렌 김의 명성이 국내외에서 자자해졌다.
1930년 그는 두 번째의 미국 유학길에 올라 콜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 이듬해 한국 최초의 여자 박사로 금의환향했다. 미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뚜렷한 지도자로 부상한 김활란이 같이 일해 주기를 원했으나, "나는 여성 교육을 통해서 조국의 발전과 독립에 이바지하겠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1939년 그는 마침내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했다. 이화여전으로는 2대, 이화학당부터 치면 7대 교장이었다. 개교 53년 만에 이화가 길러낸 이 나라 여성이 처음으로 교장이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아펜젤러 교장은 세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하여 "이 세상에는 위대하게 태어나는 사람이 있고, 노력하여 위대해지는 사람이 있고, 위대해지도록 조건지워진 사람이 있는데 헬렌은 세 번째 경우"라고 말하며 사랑하는 제자를 격려했다.

그 당시 전국의 사립학교 1,300여 개 중 미국·호주·캐나다 등의 선교 재단에서 세운 학교가 500여개 교로 미션계 학교의 비중이 매우 컸다. 일제는 미션계 학교에도 신사 참배와 가미다나 제사 등 우상 숭배를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면 폐교 처분을 내렸다. 미·일 관계 악화로 미국인들을 스파이로 모는 등 박해가 심해지자 1940년 이화에서 가르치던 선교사들도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활란 교장은 극심한 재정난과 일제의 핍박에 시달리며 학교를 이끌었다. 1941년부터 미국 감리교의 재정 지원이 끊기자 교직원 월급을 주기 위해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녀야 했다. 그러나 그는 탁월한 모금 운동가였다. 그는 재단 이사들과 함께 동분서주하며 200만 원 상당의 현금과 부동산을 기부받았다. 1943년 미국 감리교 재단에서 독립한 이화학당 재단법인이 설립되고, 이화 발전의 토대가 마련됐다. 10만 원이라는 큰 돈을 기부했던 주태경 씨는 멀리서 김활란을 흠모하던 72세의 여장부였다. 일찍 남편을 잃고 함경도 원산에서 농사와 벽돌 공장 운영으로 자수성가했던 그는 이화에 거액을 기부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중국 상해에서 기계 공장을 운영하던 손창식 씨는 잠시 귀국했다가 여성 교육의 필요성에 동감하여 50만 원을 선뜻 기부했다.
일제의 탄압은 갈수록 심해졌다. 그들은 본관과 음악관 지붕에 달린 십자가를 떼어내고, 창설자 스크랜턴과 프라이 교장의 동상을 철거하고, 본관을 제외한 건물에 일본 군대를 주둔시키기까지 했다. 1943년 12월에는 이화여전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 양성과로 교명을 바꾸고, 교육 기간을 3개월로 단축시켰다. 해방 다섯달 전인 1945년 4월에는 경성여전으로 이름을 바꿔 '이화'를 빼 버렸다.
2차 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남학생들은 학병으로 끌려가고 여학생들은 군수품 제작에 동원됐다. 지도층 인사들은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미화하고, 젊은이들이 전쟁터에 나가도록 독려하는 연설을 강요받기 시작했다. 그들의 지시대로 글을 쓰게 하여 신문 잡지에 싣기도 했다. 유명 문화인들, 사회 지도자들, 명문 사학의 교장들이 주로 동원됐다.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에 천성활란(天城活蘭)으로 이름을 바꿨던 김활란도 연설을 하고, 글을 썼다. 그의 자서전에는 연설을 하고 돌아와 실명 위험에 이를 만큼 심한 눈병을 앓으면서 "죄값으로 눈이 멀어도 달게 받겠다"고 자책하던 이야기가 나온다. 몇몇 학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면서 폐교를 감수했다. 그러나 그는 친일 연설을 하면서 학교를 지켰다.
개화기의 선각자로 미국
유학을 마치고 이화여전
에서 가르치던 교수들
(1937).
왼쪽부터 김활란 부교장,
김매리(음악과),
김애마(보육과),
정애식(음악과),
윤성덕(음악과),
서은숙(보육과)교수.

세계 최대의 여자대학으로 키우다

해방이 되었다. 이화는 이름을 되찾았다. 김활란은 두 개의 원칙 아래 학교 발전 계획을 밀고 갔다. 하나는 여자 대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대학이 세계의 흐름에 발맞춰 새로운 전공 분야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션계 학교들은 더 나은 발전을 위해 이화여대, 연희대학, 세브란스 의대를 하나의 대학으로 통합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연희대와 세브란스 의대는 연세대로 통합했으나, 김활란은 반대했다. 이화는 여자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열어 주기 위해 설립된 학교이고, 아직도 그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그 후에도 이화를 남녀 공학으로 하자는 제안이 나올 때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국회 의석의 절반을 여성이 차지하는 날이 올 때까지는 안 됩니다."
남녀 차별이 엄존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지도력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여자 대학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학교를 종합대학으로 개편하고 문교부에 인가를 신청했다. 다른 어떤 대학보다도 신속한 결정이었다. 1946년 이대는 종합대학교 1호로 인가를 받았다.
그가 새로운 전공을 개설할 때마다 시기상조론이 고개를 들었다. 여자 대학에 의학과나 법학과는 맞지 않는다는 식의 반대에 그는 귀기울이지 않았다. 여자가 하루빨리 다양한 전문직에 진출하여 사회 기여를 높이고, 새로운 시대의 요구와 도전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대는 간호학과, 교육공학과, 도서관학과, 신문방송학과, 비서학과, 특수교육학과 등을 앞장서 개설하면서 대학 사회를 이끌었다.
"여성의 능력은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하고, 아낌없이 발휘되어야 하며, 그들이 하는 일에 장애가 없어야 한다. 그렇게 됐을 때 세계는 큰 힘을 지니고, 복지 건설과 아울러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소신이었다. 그의 정신은 오늘의 이화에 계승되어 여자대학으로는 처음으로 공대를 신설하는 등 여성의 전공 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그는 섬세하고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여성이었다. 그리고 항상 크게 생각하는 지도자였다. 6·25전쟁이 터지고 피난 갔던 사람들이 서울로 돌아오자 누가 공산 치하에서 적에게 협조했느냐는 시비가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처 피난 가지 못했던 교수들이 점령군의 강요로 써냈던 자술서 내용이 회오리를 몰고 왔다. 갈등이 깊어지자 김활란 총장은 자술서 뭉치를 불태워 버렸고, 더 이상 이화 안에서는 부역 시비가 없었다.
1960년 4·19학생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대통령의 12년 집권이 끝났다. 당시 이대의 박마리아 부총장은 이승만 정부의 2인자였던 이기붕의 아내였다. 시위대에 쫓기던 그들 가족은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에 피신했다가 아들이 쏜 권총으로 집단 자살했다.
이대생들은 부총장을 의식하여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았다는 비난이 쏟아지는 등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였다. 휴교가 끝나고 첫 예배가 열렸을 때 이화 가족들은 긴장 속에서 김활란 총장의 설교에 귀기울였다. 그는 4·19의 의미를 되새기고, 희생된 학생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총장이었던 박마리아 선생과 그 가족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말로 설교를 끝냈다. 담담하면서 단호한 마무리였다.
학생 혁명이 일어난 지 1년 만인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혁명정부는 각 부문에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하면서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만들어 교육공무원 정년을 60세로 낮췄다. 당시 62세이던 김활란 총장은 김옥길 교수를 후임 총장으로 추천했다. 1921년 평남 맹산에서 태어난 김옥길은 1943년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하고 오하이오 웨슬레안대학에서 기독교문학을, 템플대학 대학원에서 교육행정을 공부한 후 기독교학과 교수로 있었다. 아펜젤러 교장으로부터 교장직을 물려받을 때 김활란이 40세였던 것처럼 김옥길도 40세였다.



정부 수립 후 파리 유엔총회에 모윤숙, 조병옥,
장면씨(앞줄 왼쪽부터)등과 함께 한국 대표단
으로 참석한 김활란 선생님(1948).


1961년 9월 30일 운동장에서 총장 이·취임식이 열렸다. 43년 동안 이화에 봉직하면서 22년간 교장·총장직을 맡았고, 이화를 세계 최대의 여자대학으로 키웠던 김활란은 맥아더 장군의 은퇴사를 인용하여 "노사는 멈추지 않고 오직 전진할 뿐"이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제일 좋은 것은 아직 앞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맨 처음에 시작이 있었던 것입니다"라는 로버트 R. 브라우닝의 시로 이임사를 끝냈다. 교직원과 학생들이 눈물을 보이자 그는 청명한 목소리로 민요 한 구절을 불렀다.
"내가 간들 아주 가며 아주 간들 널 잊을소냐.
닐리리 닐리리 닐리리야 …"

헌신의 삶, 승리의 삶

은퇴 후 그가 가장 정성을 쏟은 일은 전도였다. 그는 총장 재직 시절부터 부흥회를 통해 교직원과 학생들의 영적 생활에 각성을 주고자 노력했다. 가장 큰 부흥회는 1956년 개교 70주년 기념으로 신축한 대강당에서 열렸는데, 700명이 세례를 받았을 만큼 대성황을 이루었다. 미국 감리교 전도국 총무인 해리 덴만 박사, 「다락방」편집장인 매닝 팟츠 박사 등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들이 거의 해마다 이화에 와서 설교했고, 부흥회 때마다 수백 명씩 세례를 받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이화의 교직원과 학생들로 금란전도대를 조직하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전도했다. 빈민촌의 방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그의 모습은 제자들에게 전도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그 옛날 전도부인 김씨가 어머니와 자신의 생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또 만리이역에 찾아와 이 나라에 기독교를 전파했던 서양선교사들을 잊지 않았고, 그들에게 받은 것을 세계에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선교사의 도전에 대해 설교하면서 "누가 파키스탄의 신드사막에 가서 문맹이 대다수인 그곳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 설교가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김은자, 조성자, 전재옥 등 세명의 이화졸업생이 1960년 이슬람권인 파키스탄에 가서 10여년 동안 선교사로 일했다.
"파키스탄으로 떠나기 전 김활란선생님은 이화의 초기 교사 등 서양 선교사들이 잠들어 있는 외국인 묘지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선생님과 나는 비석에 새겨진 선교사들의 이름을 읽으며 묘지를 걸었다. 나는 침묵 속에서 선생님의 분명한 메시지를 들었다"고 지금 이대 기독교학과 교수인 전재옥은 회고한다. 김 총장은 세상을 떠나기 닷새 전, 혼수상태에 빠지기 직전에도 그에게 격려 편지를 보냈을 만큼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이화의 딸들이 세계로 나가서 어려운 나라들을 돕고, 누군가의 생을 변화시키고, 평화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이화의 뿌리에 대한 각성에서 오는 것이었다.
1950년대와 60년대의 이대 졸업반 학생들은 「여성과 교양」이라는 김활란 총장의 특강을 들었다. 명예총장으로 물러난 후에도 그는 특강을 계속하면서 교육받은 여성들이 가정과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강의했다. 그 시간에 학생들이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선생님은 왜 결혼을 안 하셨어요?"라는 것이었다. 그 질문은 그가 한평생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기도 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나는 독신주의자는 아니다. 격동기에 태어나 나에게 주어진 일을 완수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결혼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나의 길을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시대에 여자가 독신을 선택한다는 것은 경제적·정신적인 자립과 인습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것이었다. 차츰 일하기 위해 독신을 선택하는 여자들이 늘어났다.
그에게 독신이란 자기 직업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성 교육은 그에게 '성직'이었다. 그 당시 결혼한 여자가 직업을 위해 전력을 다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는 우수한 제자들이 독신으로 살면서 이화에 헌신하기를 원했다. 앞으로 학교 발전에 필요한 전공을 정해 주며 미국에 유학보냈던 졸업생들이 줄줄이 결혼할 때마다 그는 "너희들은 다 못 써"라며 실망하곤 했다. 그리고 결혼한 여자 교수들에게는 종종 "당신들은 너무 이기적이야"라고 나무라곤 했다.
그의 신념은 이화의 불문율로 굳어져 1996년 장상 교수가 기혼자로는 처음으로 총장에 선출될 때까지 미혼 총장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왔다. 김옥길(1961∼1979), 정의숙(1979∼1990), 윤후정(1990∼1996) 등 미혼 총장들은 김활란 총장이 시범을 보인 절대적인 헌신으로 이화를 이끌었다. 이화 가족 중에서 간혹 그들의 정책이나 스타일에 불만을 갖는 사람들은 있을 수 있어도 사(私)를 희생한 전적인 헌신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화가 창립 110년만에 처음으로 기혼 총장을 선출했을 때 이화 가족들은 한 세기에 걸쳐 이화를 이끌어 온 미혼의 총장들을 다시 바라보았고, 이화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그들의 헌신에 새삼 경의를 보냈다. 거의 모든 대학들이 총장 선출을 둘러싸고 분규를 겪는 동안 직선제와 간선제로 선출 방식을 바꿔가면서 큰 갈등 없이 새 총장들을 선출할 수 있었던 이화의 저력은 역대 지도자들에 대한 이화가족의 신뢰에서 나온 것이었다.
김활란 총장시절 함께 했던 김흥호 목사는 김활란을 회고하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 내가 이화에 들어와서 얻은 것은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대답을 얻은 것이다.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누구보다도 신앙적 번민에 시달려 왔다. 나의 갈등은 독신으로 살면서 이화를 위하여 헌신하는 이화인을 볼 때 화롯불 속의 눈처럼 사라졌다. 신앙은 헌신이지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 "
1970년 2월 10일 하오 8시 8분, 71세 생일을 17일 앞두고 김활란은 세상을 떠났다. 당뇨와 동맥경화증을 앓아 온 그는 1월 중순부터 병세가 악화됐고, 운명하기 닷새 전 뇌일혈을 일으켜 혼수 상태에 빠졌다. 배꽃을 수놓은 흰 공단 치마저고리와 화관을 그는 자신의 수의로 미리 골라놓았다. 회갑 잔치 때 제자들이 만수무강을 빌며 만들어 준 옷을 그는 하늘나라로 가는 길에 입고 싶어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그의 유언장은 가장 김활란다운 것이었다.
"… 나는 인간의 생명이란 영원 불멸하는 것으로 믿고 날마다 하나님께서 힘 주시는 대로 더 좋은 생명의 길을 찾기 위해 살았다. 육체와 환경에 얽매인 것을 극복하면서 내 나름대로 승리의 길을 걸어오느라 힘썼다. 흙 속에 속한 육체의 기능이 퇴폐하여 심장의 기능이 그친다고 해서 내가 죽은 것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를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장례식을 해 주는 것은 싫다.
세상에서 체험할 수 있었던 더 풍성한 생명의 길로, 또 더욱 화려한 승리의 길로 환송해 주는 환송 예배를 장례식 대신 해 주기를 바란다. 거기에 적합하게 모든 승리와 영광과 생명의 노래로 엮은 웅장하고 신나는 음악회가 되기를 원한다 …."
14일 하오 1시 이대 대강당에서 환송 예배가 있었다. 그의 유언대로 더욱 화려한 승리의 길로 환송해 주는 고별 예배였다. 정부는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르도록 결정하고 일등 수교훈장을 추서했다. 국립교향악단과 이화여대 관현악단, 이대합창단이 임원식 지휘로 베르디의 「개선의 기쁜 노래」, 하이든의 「하늘은 주의 영광을」을 협연했다. 그의 유해가 망우리 묘지로 가는 동안 수천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서 한 시대를 상징했던 '신여성 김활란'을 환송했다. 그는 16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누워 있는 망우리 금란동산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그가 좋아하던 성경 구절이 새겨졌다.
신앙과 교육으로 인습의 사슬을 끊고 거듭났던 여성, 수많은 여성들을 가르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그의 생은 오늘도 우리에게 무엇이 '승리의 길'인지를 묻고 있다. 그의 '승리'는 어둠 속에서 울부짖던 이 나라 여자들이 함께 거둔 승리였다. 그리고 그가 세웠던 원대한 목표는 21세기를 향해 우리가 가야 할 목표이기도 하다.

이 글은 김활란 선생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간행된 1999년 이화사진일기 "여성의 빛,
김할란"에 실린 장명수 동창의 글을 전
동창이 함께 읽기 위하여 재수록
한다. <편집자 주>
Posted by 에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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