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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5.27 역사의 심판 - 청주, 3.1공원 '정춘수' 동상 철거

역사의 심판 -청주 3.1공원 정춘수 동상 철거

철거된 정춘수 동상"피고는 독립선언서가 온당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판사가 묻자
"잘된 것도 있고 잘 안된 것도 있으나 나는 독립청원을 할 의사가 없었고 그선언을 한 것도 내 의사가 아니므로 3월 1일에 오지 않았다."라고 답을 하고 있다.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쓰러지는 어린학생과 노인을 뒤로 하고 종로경찰서에 자수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인 '청오 정춘수'가 판사의 질문에 답한 내용의 일부이다.
정춘수 스스로 민족대표로서 자격이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후 감리교 목사를 하고 있을 때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을 때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풀려난 정춘수는 종교인의 양심마저 버리고 친일의 길로 치닫게 된다. 이때 발표한 성명서의 내용이다.

    "아등(我等)은 일즉이 민족자결주의의 단체인 동지회의 연장으로서 흥업구락부를 조직, 활동하다가 지나사변 이래의 급격한 변환에 감하여 종래의 포회(抱회)한 바 주의 주장의 오류를 인정하고, 참다운 황국 일본의 국민인 신념하에 흥업구락부를 해산당함에 아등의 거취와 동향과를 밝힘과 동시에 아등의 포지한 이상과 주장과를 자에 피력하려 하는 바이다"로 시작하여, 일제에 철저히 전향·협력할 것을 밝히고, "아등은 그 활동 자금으로서 금일까지 저축한 금 2400원을 서대문경찰서에 의뢰하야 국방비의 일조로서 근(謹)히 헌납하고자 한다" (매일신보, 1938. 9. 4).

정춘수의 친일활동은 종교인으로서 지켜야할 기본 양심도 버리고 자'경성기독교연합회'에 부위원장, '일선감리교특별위원회' 위원, "기독교 조선감리회는 내선일체의 원리를 실현하고 일본정신을 함양한다"는 감리교 혁신안 발표, '시국대응 신도대회', '총진회' 회장',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 신도와 함께 부여신궁공사 참가, '국민총력 기독교 조선감리교단연맹 이사회'를 열고 교회의 철문, 철책 등을 헌납하도록 하는 '종교보국 5개항' 발표, 일본의 교단규칙에 따라 교단을 재조직하고, 일장기를 두르고 남산 신사에 참배하는등 종교 황민화를 주장하였다. 해방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60여일 구속되었고, 교내 재건파가 "감리교회 배신(背信).배족(背族) 교역자 행장기"를 통해 친일 종교인의 숙청을 추진하자 정춘수는 천주교의 대표적인 친일파로서 '스스로 신사참배를 정기적으로' 한 노기남을 찾아가 천주교로 개종하며 개종의 심정을 묻자 친일 활동을 뉘우치지 않고 합리화를 위해 변병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이 문제를 말하려면 자연 과거지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1 운동 때 33인의 하나로 나라를 위하여 싸우겠다는 나의 정신은 오늘까지 변치 않았다. 그러나 세태의 변함을 따라 전쟁이 점점 심해짐으로 일본 정부와 협력하는 척했고, 아홉 교회를 살리기 위하여 한 교회를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세인들이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나의 밑에서 나의 지도를 받고 지내던 사람들이 나를 친일파라고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갖은 방법과 수단을 다해서 나를 중상하며 전부터 말해 오던 숙청을 하려 하니 나는 숙청을 당하기 전에 먼저 내가 자가숙청을 한 것이다.…… 하여튼 내가 50년이나 인도한 교회가 나에게 불만하다. 가령 예배 보는 것도 엄숙을 많이 주장했으나 그대로 되지 않고 개신교를 무식한 구교인들이 열교라고 하는데 참말 교파의 갈래가 너무 많아 열교이다. 그러니 감리교회에서 떠난다고 장로교회나 성결교회로 갈 수 없고 결국 천주교회에 들어가 평신도의 자격으로 남은 여생을 조용히 지내려 한다……정춘수는 감리교회와 아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리려 한다.(대한감리회보, 1949. 12. 25)

정춘수는 한국전쟁때 피난처인 충북 청원군 강외면 궁평리에서 1951년 10월 27일 79세로 사망했다. 그러나 1980년 8월 15일 민족대표33인 가운데 충북지역의 6명(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석구 신홍식 정춘수)을 기념하기 위해 청주 우암산 중턱에 만든 3.1공원에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다시 부활했다. 그후 정춘수가 함께 있는 3.1공원은 역사적 의미를 잃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하잘 것 없는 공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1993년 충북 지역 사회단체들이 정춘수의 친일행적을 문제삼아 정부와 국회 등 관계기관에 진정을 내어 정춘수 동상 철거를 요청하였으나 무시되고, 강제철거를 공권력으로 막곤 했다. 그리고 1995년 12월 충북도지사가 동상 자진 철거 결정을 내렸으나 청주시의 반대로 그 시행을 미루자 1996년 2월 8일 2.8독립선언 77돌을 기념하여 충북지역 사회단체는 경찰, 공무원, 국내외 방송기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강제철거를 하고 정춘수는 창고에 쳐박혀 가족도 찾아가길 거부하는 신세가 되었다.

지금 3.1공원에는 민족을 배반하고 종교인의 기본 양심마저도 내버린 '청오 정춘수'의 동상이 있던 자리는 빈 기단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며 역사의 준엄함을 말하고 있다.

정춘수 동상 철거 일지

1993

충북역사정의실천협의회 정춘수 친일경력으로 철거문제 제기. 서명운동

1994.10.19

충북지역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 창립 및 정춘수 동상 철거 촉구

1995.2.20

정춘수 동상에 일장기 부착

1995.3.1

정춘수 동상 철거 및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3.1절 기념시민대회
철거시도(공무원 및 경찰저지)

1995.4.13

정춘수 동상 철거 공청회-연대회의

1995.8.9

연대회의 정진동(목사), 도종환(시인), 이관복등 도지사 면담
- 도민의 의견을 모아 95년말까지 해결하겠다는 도지사의 입장을 수용하며 8월 12일 동상철거식은 보류하기로 결정

1995.10.16

동상철거 청원 반려 의결(도의회 내무위) 반려사유
-3.1공원의 재산권 및 관리권자인 청주시에서 처리

1995.12.8

도지사 철거 지시(지사실=시장,교육감,유관기관장), 철거지시(도지사->정진동)

1995.12.9

행정 부지사실 - 청주 부시장 참석 의회 결과 96년 3월 1일까지 시에서 처리하도록 지시

1995.12.20

정춘수 동상 연내 강제철거 시도연기(연대회의->시), 강제철거를 일시 연기하고 충북도와 청주시의 철거 추진을 살펴본후 행동

19961.25

정춘수 동상 철거에 대한 질의 회신 통보(동상 철거 여부 결정, 이에 따른 구체적인 처리계획을 시에서 수립시행하고 그 결과를 제출할 것)

1996.1.27

철거 시도 저지(시공무원, 경찰)

1996.2.8

경찰과 시공무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동상은 무너지고 정춘수는 역사의 심판을 받음

Posted by 에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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