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의 형부 - 밀정 김달하와 '우월'

김활란의 언니 애란이 이화학당에 다닐 무렵 상처한 김달하의 청혼이 들어왔다. 당시 김달하는 두 번의 상처를 하고 5명의 아들이 있었다. 평북 의주 태생인 김달하는 서북학회에서 활동하기도 하였고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던중 1915년 총독부 밀정으로 북경에 이주를 한다. 1922년 5월 '세계기독학생연합회'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에 온 김활란은 김달하의 집에 묵게 되는데 당시 상황과 '우월'이란 호를 짓는 과정을 '이모님 김활란'에 김정옥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모님이 북경에 오셨을 때 나(김정옥)는 열한 살이었다. 북경의 우리집은 어느날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헬렌이 나라 대표로 여기 온대요. 오래는 못있고 두 주일쯤 있는다는데 우선 회의 장소인 청화대학교 기숙사에 머물다가 회의가 끝나는 대로 우리집에 와서 며칠 묵겠대요"
    나는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이렇게 반가운 소식을 전하는 것을 들었다. 세 살 때 한국을 떠났던 나는 이모님을 기억하지 못했으므로 그때 처음으로 이모님을 대하는 셈이었다. . . . . .
    "또 달이로구나" 만나보시자 나온 첫 말씀이었다. 그날밤 아버지는 어머니에기 이렇게 말씀하셨다.
    "처제를 오랜만에 만나니 정말 더 좋아졌군. 학식이 몸에 배었고 인품이 깨끗하게 닦아졌소. 밤하늘의 보름달처럼 앞으로 처제의 빛이 이 나라와 많은 사람들에게 비춰질 거요. 나는 장래가 밝은 처제에게 '우월'(又月)이란 아호를 지어주겠소. 하늘에 달이 있듯이 이땅에도 또 달이 있다는 뜻으로 말이오." 이래서 이모님은 북경여행 기념으로 '우월'이란 호를 갖게 되었고 이 아호를 소중히 알고 평생쓰셨다.

북경에서 김달하는 밀정짓을 하는 대가로 받는 생활비로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하던 망명객들과는 달리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김달하가 총독부의 지령을 받는 밀정이라는 소문이 무성하던 무렵 김달하가 심산 김창숙선생을 찾아 왔다.
"앞날을 생각하면 조선독립도 참 막연하지요. 이국에서 고초만 겪어야 하니 딱하지 않습니까?"
"고생이야 각오를 한 것, 혁명가의 본색이 아니겠오?"
"그게 아닙니다. 선생 생전에 독립이 안될 것은 뻔한 노릇이예요. 고생하느니 귀국해서 안락한 가정을 누리시는게 어떨까요? 하도 딱해보여서 제가 총독부에 사전교섭을 했습니다. 경학원 부제학 자리를 비워 놓고 기다리는 중이니 귀국을 하시지요?"
김달하는 1925년 3월 30일 '다물단'(多勿團)원에게 피살되어 아궁이에 처박히는 종말을 맞았다.

Posted by 에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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