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심판 -'문예진흥원' 이희승 흉상 건립계획 철회

문예진흥원의 이희승 흉상건립계획이 친일활동을 문제삼은 한글단체와 노조의 반대로 취소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당시 참가자의 자료를 정리하여 올릴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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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심판 -통영 유치진 흉상 철거

    '대추나무'는 1941년 내가 일제의 강요에 못 이겨 현대극장을 주재하던 무렵에 쓴 작품이었다. '대추나무'는 이렇게 일제의 강압하에서 쓴 작품이지만, 그 무렵에 쓴 '흑룡강'이나 '북진대'(北進隊)와는 달라 아첨하는 구석이 없다.……작품상으로 '대추나무'는 그대로 재미 있는 것이었고, 지금도 나는 이 작품을 나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는 데 서슴지 않는다. 이렇게 내가 작가적 양심으로 아끼던 작품이라 '대추나무'만은 친일작품으로 도매 취급당하는 것이 몹시 언짢았다. '대추나무'는 나의 작가적 고충이 적잖이 서려 있는 유달리 애착이 가는 작품이었다. 내가 대학 연극 콩쿠르에 내놓은 '왜 싸워'는 이러한 '대추나무'를 개작한 것이었지 친일성이 강한 '흑룡강'이나 '북진대'를 개작한 것은 아니었다.(동랑자서전)

위글은 1957년 '전국남녀대학생 연극경연대회'의 지정작품 '왜 싸워'가 친일작품이라는 문교부의 지적으로 말썽이 되자 당시의 상황을 자서전에 남긴 내용이다. 자신이 대표작이라고 하는 '대추나무'는 과연 어떤내용인가 알아보자. 1942년 '조선연극문화협회' 주관, '총독부' 후원으로 부민관에서 열린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 출품하여 작품상을 받았다. 관변단체가 주관한 총독부 후원 행사의 작품상을 받은 작품이라면 내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친일작품'이 분명한 '대추나무'를 개작하여 대학생 연극제의 지정작품으로 내세운 유치진은 해방후에도 친일근성을 버리지 못한 자신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그럼 스스로 친일작품으로 인정한 북진대는 '흑룡강'은 돈을 받고 조국을 팔기위해 '병합청원'을 한 일진회장 이용구를 '선각자'로 미화한 작품이다. 이런 유치진이 '3.1문학상'을 수상하고 어린 학생들이 그의 작품으로 공부하는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이 안타가울 뿐이다.

민족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유치진의 고향은 통영으로 이순신 장군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다. 1990년 11월 통영문화재단이 남망산공원에 이순신장군동상과 3.1독립운동 기념비를 지척에 두고 유치진의 흉상이 세우자 지역 문화.예술계 인사는 '유치진 흉상 철거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철거요구를 하였다. 여론이 거세지자 철거를 약속하고도 기일을 미루다 광복 50주년을 맞는 1995년에 자진철거 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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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심판 -청주 3.1공원 정춘수 동상 철거

철거된 정춘수 동상"피고는 독립선언서가 온당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판사가 묻자
"잘된 것도 있고 잘 안된 것도 있으나 나는 독립청원을 할 의사가 없었고 그선언을 한 것도 내 의사가 아니므로 3월 1일에 오지 않았다."라고 답을 하고 있다.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쓰러지는 어린학생과 노인을 뒤로 하고 종로경찰서에 자수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인 '청오 정춘수'가 판사의 질문에 답한 내용의 일부이다.
정춘수 스스로 민족대표로서 자격이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후 감리교 목사를 하고 있을 때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을 때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풀려난 정춘수는 종교인의 양심마저 버리고 친일의 길로 치닫게 된다. 이때 발표한 성명서의 내용이다.

    "아등(我等)은 일즉이 민족자결주의의 단체인 동지회의 연장으로서 흥업구락부를 조직, 활동하다가 지나사변 이래의 급격한 변환에 감하여 종래의 포회(抱회)한 바 주의 주장의 오류를 인정하고, 참다운 황국 일본의 국민인 신념하에 흥업구락부를 해산당함에 아등의 거취와 동향과를 밝힘과 동시에 아등의 포지한 이상과 주장과를 자에 피력하려 하는 바이다"로 시작하여, 일제에 철저히 전향·협력할 것을 밝히고, "아등은 그 활동 자금으로서 금일까지 저축한 금 2400원을 서대문경찰서에 의뢰하야 국방비의 일조로서 근(謹)히 헌납하고자 한다" (매일신보, 1938. 9. 4).

정춘수의 친일활동은 종교인으로서 지켜야할 기본 양심도 버리고 자'경성기독교연합회'에 부위원장, '일선감리교특별위원회' 위원, "기독교 조선감리회는 내선일체의 원리를 실현하고 일본정신을 함양한다"는 감리교 혁신안 발표, '시국대응 신도대회', '총진회' 회장',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 신도와 함께 부여신궁공사 참가, '국민총력 기독교 조선감리교단연맹 이사회'를 열고 교회의 철문, 철책 등을 헌납하도록 하는 '종교보국 5개항' 발표, 일본의 교단규칙에 따라 교단을 재조직하고, 일장기를 두르고 남산 신사에 참배하는등 종교 황민화를 주장하였다. 해방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60여일 구속되었고, 교내 재건파가 "감리교회 배신(背信).배족(背族) 교역자 행장기"를 통해 친일 종교인의 숙청을 추진하자 정춘수는 천주교의 대표적인 친일파로서 '스스로 신사참배를 정기적으로' 한 노기남을 찾아가 천주교로 개종하며 개종의 심정을 묻자 친일 활동을 뉘우치지 않고 합리화를 위해 변병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이 문제를 말하려면 자연 과거지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1 운동 때 33인의 하나로 나라를 위하여 싸우겠다는 나의 정신은 오늘까지 변치 않았다. 그러나 세태의 변함을 따라 전쟁이 점점 심해짐으로 일본 정부와 협력하는 척했고, 아홉 교회를 살리기 위하여 한 교회를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세인들이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나의 밑에서 나의 지도를 받고 지내던 사람들이 나를 친일파라고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갖은 방법과 수단을 다해서 나를 중상하며 전부터 말해 오던 숙청을 하려 하니 나는 숙청을 당하기 전에 먼저 내가 자가숙청을 한 것이다.…… 하여튼 내가 50년이나 인도한 교회가 나에게 불만하다. 가령 예배 보는 것도 엄숙을 많이 주장했으나 그대로 되지 않고 개신교를 무식한 구교인들이 열교라고 하는데 참말 교파의 갈래가 너무 많아 열교이다. 그러니 감리교회에서 떠난다고 장로교회나 성결교회로 갈 수 없고 결국 천주교회에 들어가 평신도의 자격으로 남은 여생을 조용히 지내려 한다……정춘수는 감리교회와 아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리려 한다.(대한감리회보, 1949. 12. 25)

정춘수는 한국전쟁때 피난처인 충북 청원군 강외면 궁평리에서 1951년 10월 27일 79세로 사망했다. 그러나 1980년 8월 15일 민족대표33인 가운데 충북지역의 6명(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석구 신홍식 정춘수)을 기념하기 위해 청주 우암산 중턱에 만든 3.1공원에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다시 부활했다. 그후 정춘수가 함께 있는 3.1공원은 역사적 의미를 잃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하잘 것 없는 공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1993년 충북 지역 사회단체들이 정춘수의 친일행적을 문제삼아 정부와 국회 등 관계기관에 진정을 내어 정춘수 동상 철거를 요청하였으나 무시되고, 강제철거를 공권력으로 막곤 했다. 그리고 1995년 12월 충북도지사가 동상 자진 철거 결정을 내렸으나 청주시의 반대로 그 시행을 미루자 1996년 2월 8일 2.8독립선언 77돌을 기념하여 충북지역 사회단체는 경찰, 공무원, 국내외 방송기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강제철거를 하고 정춘수는 창고에 쳐박혀 가족도 찾아가길 거부하는 신세가 되었다.

지금 3.1공원에는 민족을 배반하고 종교인의 기본 양심마저도 내버린 '청오 정춘수'의 동상이 있던 자리는 빈 기단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며 역사의 준엄함을 말하고 있다.

정춘수 동상 철거 일지

1993

충북역사정의실천협의회 정춘수 친일경력으로 철거문제 제기. 서명운동

1994.10.19

충북지역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 창립 및 정춘수 동상 철거 촉구

1995.2.20

정춘수 동상에 일장기 부착

1995.3.1

정춘수 동상 철거 및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3.1절 기념시민대회
철거시도(공무원 및 경찰저지)

1995.4.13

정춘수 동상 철거 공청회-연대회의

1995.8.9

연대회의 정진동(목사), 도종환(시인), 이관복등 도지사 면담
- 도민의 의견을 모아 95년말까지 해결하겠다는 도지사의 입장을 수용하며 8월 12일 동상철거식은 보류하기로 결정

1995.10.16

동상철거 청원 반려 의결(도의회 내무위) 반려사유
-3.1공원의 재산권 및 관리권자인 청주시에서 처리

1995.12.8

도지사 철거 지시(지사실=시장,교육감,유관기관장), 철거지시(도지사->정진동)

1995.12.9

행정 부지사실 - 청주 부시장 참석 의회 결과 96년 3월 1일까지 시에서 처리하도록 지시

1995.12.20

정춘수 동상 연내 강제철거 시도연기(연대회의->시), 강제철거를 일시 연기하고 충북도와 청주시의 철거 추진을 살펴본후 행동

19961.25

정춘수 동상 철거에 대한 질의 회신 통보(동상 철거 여부 결정, 이에 따른 구체적인 처리계획을 시에서 수립시행하고 그 결과를 제출할 것)

1996.1.27

철거 시도 저지(시공무원, 경찰)

1996.2.8

경찰과 시공무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동상은 무너지고 정춘수는 역사의 심판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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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심판 -대구 박중양 기념비'일소대' 철거

경기도 양주 출생인 박중양은 1897년 일본으로 유학을 하면서 쌓은 일본 정계인사와 유창한 일본어를 바탕으로 친일관료로 길을 걷게 된다. 3.1만세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날 때 자제단(自制團)의 단장이 되어 "경거망동으로 인하여 국민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일이 없도록 . . . "이라고 외치고, "누구라도 이완용과 동일한 경우의 처지가 된다면 이완용 이상의 선처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이완용 등은 매국노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경북관찰사,충청남도 도장관, 중추원참의, 황해도 지사, 충북지사,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임전보국단' 고문, '총력연맹' 참여, 각종 학병권유 연설, 3.1운동 당시 '자제단' 결성등 박중양은 일본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철저한 일인 관료가 되어 이등박문의 양자라는 말이 나돌정도였다. 해방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변명으로 일관한 박중양의 흔적이 아직도 대구 중심에 남아있다. 침산동 침산공원, 박중양 스스로 1943년에 자신의 기개를 알리기 위해 '일소대'(日笑臺)라는 글을 새긴 타원형의 큰돌을 4단 기단 위에 세운 기념비가 있었다. 1996년 10월 11일 박중양의 후손이 철거하기 전까지 '일소대'를 향해 치성을 드리는 노인이 있을 정도로 박중양은 엄청난 행운을 누리고 있었다. 이와 같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해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회(회장 여환권)을 중심으로 '일소대 철거 위원회'를 결성하여 철거계획을 세우고, 1996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념하여 박중양의 친일 행위를 고발하는 안내문을 세웠다. 그 후 '박중양'의 실체를 알게된 시민들의 여론이 나빠지자 후손들에 의해 자진 철거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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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심판 - 서울대 장발(張勃)흉상 철거논란

서울대 미대 장발 흉상

여류 친일인사 김활란(金活蘭)씨의 이름을 딴 '김활란상' 제정을 둘러싸고 '친일논쟁'이 한창인 가운데 이번엔 서울대 미대 초대학장을 지낸 장발(張勃)씨(97 재미화가)의 친일행적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제의 발단은 지난 8월31일자로 이 대학 디자인학부 소속 김민수(金珉秀 37) 조교수가 재임용에서 탈락한 데서 비롯됐다. 대학측은 金교수의 재임용 탈락사유가 연구실적 부진 때문이라고 밝혔다. 반면 독립운동가단체들은 金교수가 장발씨 등 미술대 교수 출신 원로들의 친일행적을 거론한 데 대한 '괘씸죄'때문이라며 96년 미대 건물 앞에 건립된 張씨의 흉상철거를 주장하고 나섰다.

金교수는 지난 96년 개교 5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초대 미대학장 張勃씨를 함, 교수 출신 원로 3명의 친일행적을 거론한 바 있다. 이 가운데 張씨는 일제하 조선미술가협회 서양화부 평의원으로 활동한 사실이 있다. 이 단체는 수차례 전람회를 열어 그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친 친일단체. 한편 민족정기수호연합(대표 趙文紀) 등 민족단체들은 최근 총장 앞으로 보낸 공문에서 "11월15일까지 張씨의 흉상을 철거하지 않을 경우 우리 손으로 철거하겠다"고 밝히고 있어 흉상철거를 둘러싸고 한 차례 충돌이 예상된다.

지난해 연구논문 부실을 이유로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한 전 서울대 미대 조교수 김모씨는 11일 서울대 총장을 상대로 교수재임용 거부처분 취소청구 소송을 서울 행정법원에 냈다. 김씨는 소장에서 "교내 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연구논문에서 서울대 미대 원로교수들의 친일행적을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평소 성실하게 학문연구와 학생지도에 전념해온 원고에게 "연구실적 평가미달"이라는 허울을 씌워 교수재임용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재량권 남용"이라고 주장했다. (대한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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