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씨개명

참고자료 2006. 5. 27. 12:34

창씨개명 創氏改名

1940년 2월 11일 실시한 제령 제 19호 '조선민사령중 개정 건'은 '창씨'를 규정하고 제령 제 20호 '조선인의 씨명에 관한 건'은 '개씨,개명'을 강제하기 위한 것으로 창씨와 개명을 통해 진정한 천황의 적자가 되어야 한다는 황국 신민화정책의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조선징병제' 시행을 위한 준비작업이기도 했던 창씨개명은 이름을 죽음보다 중요시한 우리민족에겐 무엇보다 가혹한 탄압이었다. 새로 부임하는 지방명에 조상의 이름자가 들어 있다는 이유로 부임을 포기했던 이들은 창씨개명을 죽음으로 맞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는 창씨개명에 앞장서기도 했으며 창씨의 명분을 교묘한 글솜씨로 표현 하기도 하였다.

김활란의 창씨개명 - 「이모님 김활란」 중 김정옥지음

    1940년부터 일본은 창씨를 강요해 왔다. 많은 사람들이 갖은 핑계를 만들어 이것을 피했으나 단체나 기관의 책임자들에게는 솔선수범이 강요되었다. 이모님은 '김해 김씨'였는데 친척들은 창씨를 한다면 '김해'의 본관을 따르자는 의견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모님은 어차피 창씨를 해야 한다면 정말 창씨를 해서 자신의 독립된 일가를 세울 생각이었다. 이래서 '천성'(天城)을 선택했다. 찬송가에도 '천성을 향해 가는 모든 신도'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천성활란'(天城活蘭)시절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이광수의 창씨개명 향산광랑(香山光郞) - '선씨고심담'(選氏苦心談)과 '창씨와 나'를 매일신보에 발표

선씨고심담(選氏苦心談) 1940.1.5

    지금으로부터 2천6백년전 진무천황께옵서 어즉위(御卽位)를 하신 곳이 가시와라인데, 이곳에 있는산이 향구산(香久山,가구야마)입니다. 뜻 깊은 이 산 이름을 씨로 삼어 '향산'(香山)이라 한 것인데, 그 밑에다 '광수'의 '광'(光)자를 붙이고 '수'(洙)자는 내지식의 '랑'(郞)으로 고치어 '향산광랑'(香山光郞)이라고 한 것입니다.

창씨와 나 1940.2.20

    창씨의 동기

    내가 향산(香山)이라는 씨를 창설하고 광랑(光郞)이라는 일본식이름으로 고친동기는 황공하고도 위대하신 천황의 이름과 '읽는 법'이 같은 씨명을 가지려고 한데서 부터다. 나는 깊이 깊이 나의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생각한 끝에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臣民)이다. 나의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일지라도 천황의 신민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향상광랑(香山光郞)이 보다 천황의 신민으로서 어울린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내선일체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허락했다. 내선일체 운동을 (적극적으로) 해야 될 사람은 조선인 자신이다. 조선인이 내지인과 차별이 없어지는 것 이외에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따라서 차별을 제거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하자는 것 이외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성명 석자를 고치는 것이 그 노력중의 하나라면 (나는) 어떤 미련도 없다.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나는 이같은 신념에서 향산(香山이라는 씨를 창설한 것이다.

    편의

    이제부터 서서희 조선인의 씨명을 국어(일본어)로 부를 기회가 많아질 것이다. 그러한 때 '이광수'보다 '향산광랑'(香山光郞)이 훨씬 편리하다. 또 만주나 토쿄, 오사카 등에 살고 잇는 동포가 일본식 이름을 가진 것은 실생활은 물론 그 위에 많은 편리를 가질 것이다.

    결심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재래의 성명은 지나(중국)를 숭배한 선조들의 유물이다. 영랑, 술랑, 관창랑, 초랑, 소회, 이종, 거칠부, 흑치와 같은 이름들은 고대 우리 선조들의 이름이었다....... 이미 우리는 일본제국의 신민이다. 지나인과 혼동될 성명을 가지는 것보다는 자연스런 것이라고 믿는다. 거기서 나는 일본인이 될 결심으로 씨를 '향산'(香山)으로 하고 명을 '광랑'(光郞)으로 한 것이다. 나의 처자도 따라서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했다. 이것도 충성의 일단으로 믿기 때문이다.

    정치적 영향

    금년 8월 10일까지로 조선인의 창씨 기한이 끝난다. 그날의 결과는 정치적으로 커다란 영향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즉 일본식 씨를 조선인 전부가 창설한다면 그것은 조선인 2천4백만이 진실로 황민화할 각오로 임했다는 중대한 추정자료가 될 것이다. 만일 그에 반해 일본식 씨를 창설한 자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행한 쪽의 추정자료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가 조선인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사실은 조선인 자신의 행불행(幸不幸)에 커다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런고로 일본식 씨를 창설하는 것은 일종의 정치운동이라고 나는 믿는다.

Posted by 에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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