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역사 되찾기-친일의 군상(13회) 前이화여대 총장 金活蘭 |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 때 어찌 여성인들 잠잣코 구경만 할 수가 잇겟습니까. 이 날을 위한 마음의 준비는 이미 벌서부터 되여 잇섯습니다. 내지(일본)학도들과 함께 전문대학 법문계(문과) 반도(조선)학도들은 우렁찬 진군을 이르키어 특별지원병으로서 오는 1월20일에는 영예의 입영을 하게 되엿습니다.이번 반도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거러가야될 길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가지 리유 때문에 참렬을 못하는 것입니다.…아프로는 결전하의 국가목적에 쪼차 한사람이라도 더만히 우수한 지도원을 양성하기에 전력을 다할 각오가 잇슬 뿐입니다." 金活蘭(1899∼1970)이 1943년 12월25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新報)'에 기고한 '男子에게지지 않케 - 皇國女性으로서의 使命을 完遂'라는 제목의 기고문 중 한 대목이다. 일제하 지식인이 신문에 쓴 친일성향의 글 한 두편을 통해 그의 삶 전체를 평가받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거대한 감옥'또는 '노예선'으로 불리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쓴 글이라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 생명에 위협이 있었느냐, 그리고 나중에 자신의 행적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성했느냐 하는 점 등이다. 모든 지식인들에게 지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몇몇 의사.열사가 이에 속할 뿐이다. 그러나 지식인이라면 자신의 과오에 대한 반성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친일 지식인들은 자신의 친일행위를 반성하지 않았다. 친일 지식인들이 더 비난받는 이유중의 하나는 이 때문이다. 일제시대 여성 지식인이었으며 최근 그의 이름을 딴 상(賞)제정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는 김활란은 역사 앞에서 용서받을 수 있을까? 답은 긍정적이지 않은 것 같다. 이유는 그가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따라서 그의 이름을 딴 상 제정은 지식인 사회에서 여러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흔히 김활란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수식어 가운데 하나는 '여성박사 제1호'다. 그는 학사.석사.박사를 따기까지 세 차례에 걸쳐 5년간 미국유학을 했다. 귀국해서는 미국인 선교사 아펜절러(당시 이화여전 교장)의 뒤를 이어 1939년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했다. 굳이 나눈다면 그는 친미(親美)인사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대동아전쟁'이 터지자 친일,반미(反美)인사로 돌변하였다. '저 흑노(黑奴)해방의 싸움을 성전(聖戰)이라 했고 십자군의 싸움도 성전이라고 했다.…제일선 장병과 보조를 같이 하여 도의를 무시한 물질제일주의의 서양문명을 박차버리고 동아(東亞)의 천지로부터 미영(美英)을 격퇴하여 버리자'. 김활란은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 결성식 (1941.12.27,부민관 대강당)에서 '여성의 무장'이란 주제로 미영 타도를 외쳤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일제하 대부분의 친미.기독교계 인사들(白樂濬.申興雨 등)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다시 친미인사로 변신했다. 그는 미군정 시절 초대 이화여대 총장에 취임했고 이승만정권 하에서 한미(韓美)재단 이사 등을 지냈다. 3.1만세의거 당시 김활란은 이화학당 대학과를 마치고 모교의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 무렵 지하독립운동 조직과 연결돼 활동하고 있었다. '7인의전도대(傳道隊)'를 만들어 기독교 포교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단순한 전도활동 수준을 넘는, 일종의 민족운동이었다. 20년대 후반 좌우 민족진영의 통합으로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자 뒤이어 27년 4월 여성계 민족단체로 근우회(槿友會)가 결성되었다. 그는 근우회 창립멤버로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이듬해 돌연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유학을 떠났다. 31년말 그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농촌교육 관련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 귀국했다. 귀국후 문맹퇴치.봉건잔재 타파 등을 내걸고 농촌운동에 주력하였는데 이는 미국유학을 한 인텔리 여성의 소박한 조국에 대한 헌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의 친일행보는 36년 이화학당 부교장으로 있던 시절 첫걸음을 내딛는다. 그해 말 총독부 사회교육과 주최 '가정의 개선과 부인교화운동의 촉진'을 위한 사회교화간담회에 참석하였다. 37년 1월 그는 총독부 학무국의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를 결성하였고 7월 들어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한일병합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들의 부인들이 주동이 돼 전쟁물자로 바칠 금비녀.가락지를 모으기 위해 결성한 친일 여성단체였다. 이후 여러 친일단체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방송선전협의회,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임전대책협의회,조선교화단체연합회,조선임전보국단,조선언론보국회 등등. 그의 활동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기독교 활동이다. 38년 6월 조선YWCA의 회장으로 있던 그는 "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로 모여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을 자기(自期)하는 의미에서…"(매일신보,38년 6월9일)라며 일본YWCA에 가맹을 발표하였다. 당시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가 학교가 폐교를 당하고 구속자.순교자가 잇따르던 때였다. 39년 4월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한 이후 그의 친일 행각은 본격화되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학교를 지키기 위한 목적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해 김씨인 그의 문중이 본관을 따라 '김해(金海)'로 창씨를 한 것과는 달리 그는 독자적으로 '천성활란(天城活蘭 아마기가쓰란)'으로 창씨개명하였다. '어차피 창씨를 해야한다면 정말 (일본식으로)창씨를해서 자신의 독립된 일가를 세울 생각'이었다.(金貞玉의 저서 '이모님 金活蘭'중에서) '대동아전쟁' 개전(41.12.8) 이후부터는 강연.방송은 물론 가두로 나서서 일제의 침략정책을 미화,선전하였다. 특히 여성들을 대상으로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 등 인력동원에 대한 이해와 협력을 촉구했다. 43년 8월1일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황국신민의 무쌍(無雙)한 영광인 징병제는 드디어 우리에게도 실시되었다.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황공하옵신 성지(聖旨)에 다시금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나라를 위하여 불덩이 같이 끓는 피와 몸을 통털어 바쳐 성은(聖恩)에 보답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렸으며 반도 남아의 의기를 뵈일 기회는 드디어왔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이며 수 천년 역사 이래 모처럼 보는 거룩한 감격…"('매일신보'1943년 8월7일)이라고 썼다. 그는 해방직전 심한 눈병으로 고생하고 있던 자신을 문병차 찾아온 조카(金貞玉 전 이대교수)에게 "남의 소중한 아들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라고 연설을 하고다닌 죄값"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김정옥의 앞의 책 중에서) 당시 여기자 최은희(崔銀喜)는 그를 두고 '모질고 악착한 역경을 맛보지 않고 순풍에 돛단 배처럼 산 행운아'라고 평했다. 식민지 시대와 격동기를 산 지식인의 일생이 대체로 고뇌와 아픔으로 점철됐겠지만 그는 상류층의 한 층을 이루는 생애로 일관하였다. 그가 60년 가까이 이화인(梨花人)으로 살면서 일제하와 건국기에 학교를 지키고 가꾼 공로는 인정할만 하다. 그러나 그를 여성교육계, 나아가 한국여성계의 상징으로 내세우기에는 그의 일생 가운데 '흠결'은 큰 편이다. 이대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그의 친일활동이 적극적이었다. 이대측의 '김활란상' 제정 추진은 그의 업을 기리기 보다는 그의 떳떳하지 못한 삶이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대한매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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