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총력 조선연맹 國民總力朝鮮聯盟 (총력연맹) | |||||||||||||||||||||||||||||||||||||||||||||
국민총력조선연맹은(이하 총력연맹)은 이른바 총력운동의 대종이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 하고, 미일관계마저 틈이 벌어지자, 일제는 종래의 전시체제를 한층 엄한 결전체제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고독국방국가의 건설을 떠들기 시작했다. 고도국방국가 건설이란 첫째, 사상통일-일본정신의 앙양과 내선일체의 완성 둘째, 국민총훈련-직역봉공 및 생활의 신체제 확립 셋째, 생산력확충-전시경제제체 추진과 증산이 그 목표이다. 이러한 체제의 완성을 위해서 1940년 10월 16일, 일제는 정동연맹을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이를 총력연맹으로 재출발 시켰다. 위와같이 조직된 총력연맹은 총독부 고관과 아래로 일개 부락민에 이르기까지 사람과 기관, 업체의 전부를 그 조직 속에 포함하는 것이었다. 총력연맹의 조직은 첫째 지도조직-총독부안에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한 지도위원회를 두고 연맹의 기본방침을 결정하였다. 둘째, 중앙조직-조선의 전단체와 개인으로 구성원을 삼고, 총재.부총재.고문.이사.참여.참사.평의원등의 역원을 두었다. 셋째, 지방조직-도에 회장, 부.군.도.읍.면에는 이사장으로 두어 당해 기관장으로 보하고 이사.참여.평의언.등을 두었다. 지잡조직의 말단은 대락 10호 단위로 된 애국반을 기저로 하는 정.리.부락연맹이염 정총대나 구장이 그 이사장 이었다. 이밖에 총력연맹을 직역조직으로 두었으니, 국민총력00학교연맹.국민총력조선연극협회등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조직을 통해서 일제는 황민정신의 앙양,징병.학병의 독려.우원, 증산, 헌금과 공출, 군인원호 등 기타 전반의 총후운동 총력운동을 전개하였다. 가령 1941년 8월 12일 총력연맹 사무국장이 각 도연맹에 지시한 사항을 보면 첫째, 쌀의 소비규정과 공출의 적극적 실시, 둘째, 공지를 이용한 채소의 자급자족, 소위 일평원예의 실행 셋째, 군용.비료용 풀깍기의 책임량 완수등이었다. 이러한 지시가 내리면 정회와 경방단, 정연맹, 이사장인 정총대들이 앞장서서 언필칭 비국민이라 하면서 독려하고 다녔다. 반상회에 결석안해도 비국민, 신사참배를 안 해도 비국민, 공출헌금을 안 해도 비국민이었다. 이렇게 극성을 떨다 못해서 가령 소위 일평원예라면 마당 한구석 공지뿐 아니라 사과궤짝에까지 채소를 심어 먹으라고 외고 다녔다. 그뿐 아니라 중앙조직에서는 사사건건 봉고제다 기원제다 하면서 떠들어 대었다. 징병제 실시가 발표되면 봉고제, 12월 8일인 대미선전일에는 전승기원제..... 이것은 신궁에서 요인이하 관민 총동원으로 거행된 끝에 선언문.대회선언문.황군감사전보문 따위를 채택하게 마련이었다. 총력연맹은 1940년 11월 1일 국민총력앙양대회를 경성운동장에서 개최를 비롯하여 기관지 『국민총력』 발행, 라디오 프로그램인 「국민총력의 시간」, 『총력총서』발행, '고꾸꼬'보급정신대, 일본 신궁참배단 파견, 1941년 12월 10일 결전보국대 강연회등으로 황국화운도에 앞장섰다. 총력연맹은 1940년 12월 문화활동의 신체제를 위해서 사상부를 2분하여 문화부를 독립시켰다. 1943년 1월 24일 역원개편을 하고 1945년 7월 8일 조선국민의용대가 결성됨으로써 이에 합류하고 동 10일을 기해서 발전적으로 해산하였다. 그동한 총력연맹은 전후 6년 동안 정동연맹을 합산하면 전후 8년 동안에 걸쳐서 황민화.총력운동을 비롯한 모든 국민운동의 최고봉으로 군립하면서, 2천6백만 조선민중을 애국반의 세포로 조직하여 국책의 제물로 헌상하기에 급급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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