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 상 제정 설명발회 및 토론회 발언록

언 제

1998년 11월 3일 화요일

어디서

이대학생관 지하 소극장

참석자

장상 총장

김흥호목사(56~84년 교목)

김세영(동창회 고문)

강선영 총학생회장(특교.4)

최유정(행정.2)

유선희(신방.2)

조아라(외교.2)

이상하 교수(철학과)

김갑순(문과.35년 졸)

장필화 교수(여성학과)

이경숙(동창회 부회장)

장상 총장
이화가 112주년이 되면서 과거 100년사를 알아 본 결과 김활란 박사가 이화를 확대 성장시키는 데 가장 큰공헌을 했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했다. 이에 김활란 박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사업을 펼치기로 했다. 그 중하나는 여성상을 제정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장학금을 책정해서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김활란 박사는 지난 100년간의 한국 근세 여성사, 더 확대해 조선시대 500년까지 합쳐 우리가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한국이 낳은 아마도 거의 유일한 세계 여성 지도자일 것이다. 그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한국 부흥을 위한 농촌 계몽'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여성 최초의 박사가 되고이화여전을 이화여자대학교 즉 당시 최초의 종합대학교로 승격시키고 의학, 약학, 자연계열을 설치한다.김활란 박사는 이렇게 교육가로서 뛰어날 뿐 아니라 한국 여성 운동의 틀을 잡은 여성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40년대쯤 되면 일제에 의해서 발생한 오욕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이에 대해 본인은 조만식 선생,김성수 선생 등 많은 지도자가 민족적인 아픔을 스스로 감당했다고 생각하며 김활란 선생도 마찬가지 였으리라 본다. 이런 것을 총체적으로 평가할 때 많은 사람이 한국이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여성지도자가 김활란 박사라는것에 동의했고 김활란 박사기념사업회를 결성해 상을 제정하게 됐다. 기념사업회와 학생과의 대화가 더 폭넓게 이뤄졌으면 좋았겠지만 상 제정 경과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김흥호목사 (56~84년 교목)
기자가 김활란 박사가 친일파라고 쓴 것을 읽었는데 사실 김활란 박사는 일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당한 사람이다. 김활란 박사가 징병에 관한 글을 썼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본이 쓴 후 강제로 도장을 찍도록 한 것이지 직접 쓴것이 아니며 당시 학도병은 일본 사람이 끌고 간 것이다. 그 당시 머리가 좀 된 사람(배운 사람)은 끌려다니면서 친일한 것이지 자발적으로 한 것은 없다. 김활란 박사도 잠을 못 이루며 지낸 세월을 지금 와서 친일파라고 모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김세영(동창회 고문)
전 우월 김활란 상 제정 소식을 듣고 내년이 탄생 100주년이 되는 때라 시기적으로도 적절한 뜻있는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전 통신 이화방에 들렀다가 신문에 난 기사와 사설들 그리고 상 제정 반대의글을 읽고 다소 놀랐다. 반대하는 사람은 김활란 박사가 친일을 하고도 참회하는 기색이 없었다, 창씨를 하여 일본 이름을 가졌다는 등 이른바 친일 활동을 근거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지도층 인사들은 일제에 집중 공격을 받던 상황이고 김활란 박사도 일본이 시킨 대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박사는 정신적, 심리적 고통으로 심한 안질에 걸리는데 그때 김활란 박사는 "남의 귀한 아들들을전쟁터에 나가라고 했으니 하늘이 가만 놔두실 리 없지"라며 참회를 했다고 한다.

강선영 총학생회장(특교.4)
는 오늘 이 자리에서 김활란 상 자체에 대해 폐기 여부까지 논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현재 이 자리에서는 기본적으로 학생들의 입장을 밝히며 토론회를 진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후 10일(화) 토론회를 제안하며, 다시 한번 김활란 상 제정, 폐기 여부 등에 대해 토의를 했으면 한다. 다음은 단대 학생회장,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논의를 거친 것이다. 김활란 박사의 외적 업적은 상당하지만 그것이 많은 사람의 희생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인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즉 김활란 박사는 그 시대 지도자로서 징용, 정신대를 기꺼이 나가려하는 민중을 만들어 낼 정도로 발언의 영향력이 컸던 분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기본적 철학과 가치도 인간의 생명과 삶을 유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김활란 박사가 이룩한 많은 업적을 평가하면서도 그것이 많은 사람의 희생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대로 업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또 학교에서 얘기한 것처럼 21세기 발전에 있어서 이화여대의 이름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그러나 현재 이화의 교육환경은 한 강의실에서 수백명이 함께 공부하는 등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내실부터 다져야 할 때로 학생복지시설 등 학내 시설에 우선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게다가 김활란 박사의 업적이 학내에서 제대로 평가과정을 거치지 못한 상황에서 김활란 박사의 이름을 걸고 이화의 이름이 대외적으로 선포될 수 있는가 의구심이 든다. 그 결과 우리는 우월 김활란 상의 폐기를 요구하며 역사적인 정당한 평가 후에 다시 김활란 상 자체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유정(행정.2)
조선일보에서 김활란 상을 제정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난 후 학교에서 총학생회 대자보도 봤다. 그러나 대자보의 내용이 학생회와 다수의 목소리만 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또 총학생회의 대자보는 상금5000만원(미화 5만달러)의 출처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학생들이 21세기 발전기금으로 아는 등 오해의 요소가 많았다. 그리고 우월 김활란 상이 여러 동창과 이화를 사랑하는 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학생들이 그 제정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또 한편으로 김활란 박사가 만약 친일을 하지 않고 은둔했다면 우리나라에 어떤 이익이 되었을까 생각해 볼 때 오히려 친일한 것이 용감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유선희(신방.2)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 하더라도 평가는 다르게 이뤄져야 한다. 또 학내에서조차 김활란 박사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평가를 한 이후 상 제정 여부를 논의하자.

조아라(외교.2)
김활란 박사의 업적이 많다는 이유로 친일을 했다는 모든 과실을 지나쳐선 안된다.

이상하 교수(철학과)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우월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기념 사업의 주제는 여성 교육과 21세기 발전을 위한 이화 점검을 주제로 한다. 그러므로 김활란 선생도 여성 지도자, 교육가로서 평가해야지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평가하는 남성들과는 다른 당파성을 가져야 한다. 이화인으로, 여성으로서의 당파성을 가지고 김활란 박사를 평가해 우월상에 대한 찬반 입장을 정해야 한다.

김갑순(문과.35년 졸)
박사가 친일을 했더라도 매우 괴로워했다. 밤에 침실을 찾아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잠을 못자고 이리저리 뒤척거리던 박사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난다. 즉 스스로 큰 죄를 지었구나 하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필화 교수(여성학과)
정신대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적극적으로 진행된 것은 90년대 이화에서 문제제기하면서 부터였다. 그후 정신대문제가 세계적인 여론으로, 국제법으로 다뤄지게 됐다. 이러한 이화를 있게 한 분이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대문제를 해결해가는 바탕이 이화가 돼야하며 이화에서 여성의식을 길러내야 한다.

이경숙 (동창회 부회장)
이 상의 목적은 상을 받는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것과 동시에 모든 이화의 자세를 그런 방향으로 정립하자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동창회는 그 상의 제정과 모든 사업을 적극 지지하며 기금 모금에 모든 동창이 적극 참여하여 현재 많은 금액이 모금됐으며 지금도 많은 힘을 모으고 있다. 오늘의 이화를 있게 하신 스승의 한 부분의 허물만을 고집하다 우리 여성과 이화의 스승을 잃는 실수를 범하지 말자.

총학생회장 강선영(특교.4)
친일을 했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얼마나 민중들을 바라보고 있었는가를 문제삼는 것이다. 민중들의 삶을 유린한 채 그것을 반성했다는 말이 있었다는 것으로 끝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러한 부분을 제대로 평가해 어떻게 극복하고 역사적으로 해결할 것인지를 얘기해야 한다.

(98년 11월 10일자 이대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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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 김동환과 그 아들의 참회

"봄이 오면" "산너머 남촌에는" 은 수 없이 외우고 불렀던 노래이다. 30여개가 넘는 시는 40여명이 넘는 작곡가의 손을 거쳐 노래로 만들어 졌다. 파인 김동환이 주인공이다. 우리 국문학사에서 '최초의 장편 서사시'로 평가받고 있는 알려진'국경의 밤'과 '북청 물장수'도 그의 작품이다. 등단 초기에 토속적인 정서로 암울한 시대 삶의 아픔을 함께 느끼며 노래한 김동환은 중일전쟁을 겪으며 황도사상을 노래하고 징병을 강요하는 언론인으로, 시인으로 변절하고 만다. 그의 주요 친일 활동은 친일잡지 '삼천리' 사장,'임전대책협의회' 창설,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와 통합 하여 '조선임전보국단' 을재출범시키고 상무이사로 활동, '조선문인협회' 발기인, '조선문인보국회' 상임이사,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대화동맹' 위원 등을 지내면서 일제말기 친일대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부인 최정희를 내세워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결성 하기도 했다. '권군 취천명', '적국항복 밧고지고', '1천병사(兵士)의 삼(森)', '고란사에서', '미영장송곡'등 여러 친일 작품을 남겼다.

해방후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반민특위에 자수한 김동환은 재판에서 공민권 정지 5년을 선고받고 한국전쟁때 납북됐다. 그후 생사는 알려지지 않고, 부인의 헌법소원으로 55년 사망신고가 되었다가 아들 김영식씨의 취소청구 로 현재는 행방불명 상태로 되어있다.

1999년 1월 14일 '민족문제연구소청년회'는 최근 파인의 문집을 내고 파인의 죄를 사죄한 김영식씨와 2시간여의 만남을 가졌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 '파인과 그의 아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친일파와 후손들을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만남이었다.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있는 이화여대는 김활란 기념사업을 다시 생각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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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99인 『김활란편』

친일의 길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金活蘭, 창씨명 天城活蘭, 1899∼1970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교육·기독교계 여성지도자의 대명사 김활란

김활란은 일제하에서는 '여성박사 1호, 전문학교의 유일한 여성교장, YWCA 창립자' 등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교육·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 꼽혀왔다. 그리고 8·15 이후에는 이화여대 총장직과 배화학원, 국제대학,동구학원, 금란여중고, 영란여중고 등 여러 학교의 이사장직을 맡았으며, 사회단체로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여학사협회, 대한부인회, 주부클럽연합회, YWCA 등 여성단체를 설립하고 회장 등의 임원직을 역임하였다. 또한 정부수립 직후에는 유엔총회 때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 6·25 때는 공보처장, 1965∼70년에는 대한민국 순회대사, 한국아시아반공연맹 이사 등 정치·외교활동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 결과 정부로부터 1963년에는대한민국장 포상을 받았고, 1970년 사망한 이후에는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을받았다. 이렇듯 여성명사의 대열에서 김활란은 빼놓을 수는 인물이다. 그러나 교육·여성계에서 그가 누렸던 명성과 지위만큼이나 일제 말기에는 교육.종교계 인물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의 친일 행각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물론 일제하에서 그가 범한 반민족 행위 때문에 그의 공헌, 그에 대한 찬사가 모두 거짓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반동강이의 우리 국토, 반공 국시를 지키기 위해 왜곡된 우리 역사 속에서 나온 찬사란 점을 직시하면서 그 속에 가려진 '진실'을 밝혀내어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자 김활란

해방 직후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단문제가 한창 논의될 때 나온{친일파군상}에서는 김활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김활란 여사는 본의로써 전쟁에 협력한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진의의 여하는 미상이나 당시 왜경찰의 주목과 엄중한 감시하에 있던 이화여전 교장의 직에 있었던 관계로 부득이 본의에 없는 자리에 출석도 하였고 말도 하였을 듯하나 좌우간 그의 언행이 세인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 횟수가 빈번하였던 것도 또한 사실이다.(60면)

이렇게 안타까운 표현이 나오기까지는 그의 활동에 대한 기억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가 민족적 성향을 띠었을 때 그는 어떠한 입장에서 활동을 하였는가.그가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고 이화학당 교사로 있을 때 3.1 운동이 일어났다. 그 당시 그는 지하독립운동 조직과 연결되어 있었다. 1920년에는 이화전도대를 만들어 조선 각지를 돌며 포교활동을 하였다. 이 때 기독교는 메시아의 도래라는 면과 관련하여 민족에게 자각과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전도활동은 단순한 전도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근우회가 창립되기 전까지의 그의 생활은 주로 학교나 종교활동에 머물기는 했지만 강연과 글 등을 통해 여성해방론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그의 민족운동관이 무지로부터의 탈피, 생활개선 등 개량적인 실력양성운동론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던 것처럼, 여성운동의 목표도 여성의 교육권.재산권 확보 등에 두고 있었다. 참정권을 말할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가능했던 전형적인 자유주의 여권론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민족문제.계급문제에대한 치열함은 부족하였으나 민족적 성향은 계속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창립될 때까지이기는 하지만 좌우합작의 근우회에도 관여하였다.1928년 근우회에서 활동을 끊은 후 주로 종교단체활동만을 계속하다가 1930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 가 박사학위를 받아 '여성박사 1호'로서 귀국하였다.

그가 귀국했을 때 민족해방운동의 양상은 크게 변해 여성계의 경우 근우회가 해소된 반면, 사회주의계 여성들은 노농조직 등에서 여성부를 조직하고 혁명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자유주의적 여권론을 주장하던 여성들은 종교단체나 민족개량주의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김활란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농민문제에 관심을 갖고 농촌사업을 벌였다. 박사논문의 주제가 농촌교육이었고 이화여전에 농촌사업가를 양성할 과를 두고자 하는 포부를 가졌을 정도로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여전히 활동 방향을 문맹퇴치, 가정경영에 필요한 지식획득, 개인적 차원에서의 경제자립, 봉건적 인습 타파, 의복개량 등에 두고 있었다.이들의 운동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반에 걸쳐 활발하게 일어났던 브나르도 운동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가면 그들의 개량적 시도는 농촌진흥운동에서의 개량적 구호, 예를 들면 문맹퇴치, 금주.금연, 절약.저축, 미신타파 등의 구호와 접근하고 있었다. 게다가 김활란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비타협적 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저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가 관심을 가진 여성해방도 민족해방 위에서만 꽃 필 수 있었음에도 점차 두 과제를 분리해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반민족행위의 시점

1930년대 중반을 넘으면서 일제는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 건설을 위해 민족말살정책, 황민화정책을 강력히 시행하여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신사참배,궁성요배, [황국신민의 서사] 낭독 등을 강요하였으며 철저한 통제망을 조직하여 우리 민족을 전쟁수행의 도구로 삼기 위해 광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식인층이 일제에게 굴복하여 반민족적 행위에 나서는 데는 각각의 계기가 있었다. 기독교계 학교에 속한 인물들은 일제가 신사참배 등의 문제로 일제와 선교사들의 입장이 배치되었을 때, 폐교를 무릅쓰고 일제의 정책에 반기를 들 것인가, 아니면 묵수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순간을 맞이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각 교파마다 그리고 각 학교마다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북장로교계에서는 학교 폐쇄를 불사하였다. 평양의 기독교계 학교 대부분과 광주 수피아고녀, 숭일고 등은 폐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나, 김활란이 몸담고 있던 이화여전은 일제의 각종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결국 일제의 요구에 응하며 이리저리 끌려 다닌 대표적인 이가 바로 김활란이었다. 그가 저지른 친일행각은 교장직을 맡았을 때인 1939년 4월 이후부터가 아니라, 조만간 맡을 가능성이 엿보였던 1936년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즉, 1936년 부교장으로서 그는 총독부 사회교육과가 '가정의 개선과 부인교화운동의 촉진'을 목적으로 주최한 사회교화간담회에서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1937년 1월 황민화정책을 철저히 하는 방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방송에도 참가하였다. 그리고 1937년부터는 일제와 관련된 일회적인 모임만이 아니라 지속적인 단체활동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즉, 1937년 1월 말에는 학무국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를 결성하였고, 중일전쟁이 터지자 손정규(孫貞圭)와 더불어 애국금차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사회자로 활약하였다. 애국금차회는 일찍부터 매국노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귀족 부인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비녀를 뽑아 바치자고 조직한 단체였다. 애국금차회의 사업은 '황군의 환송영','총후가정(銃後家庭)의 위문', '총후가정의 조문(弔問)', '일반가정부인에대한 시국인식의 강화' 철저와 국방헌납과 황군위문금품의 헌납' 등이었다. 이후 그는 이와 같은 목표를 둔 단체나 활동에 약방의 감초처럼 참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곧 '출정가족 간담회'({매일신보}, 1937. 10.6)에 참가하는 등 친일의 수렁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이전까지의 김활란의 행적에 대해서는, 일제하라는 조건에서 합법적인 계몽운동을 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애국금차회에 가담한 시기부터는 민족역사상의 분명한 반민족적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38년 3월 칙령으로 내선일체화란 이름하에 조선교육령이 개정되어 사학에 대한 통제가 더욱 심해졌다. 수업중 조선어의 사용은 금지되었다. 학생들은 군수공장에 근로동원되고 학교과정에서도 우리 문화나 전통에 관한 것은 말살되어 갔다. 그런 가운데 김활란은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00명 처녀들로 '총후 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였다. 한편 기독교 여성단체 중 가장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던 조선YWCA가 1938년 6월 8일 일본 YWCA에 가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이 때 회장이 김활란이었다. 그는 그날 "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 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로 모이지 아니하면 안되겠으므로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의 활동을 자기(自期)하는 의미에서 금번 '제네바'동맹을 탈퇴……하고 기독교여자청년회 일본동맹에 가담하게 되었다"({매일신보},1938. 6. 9)라는 발표를 하고 있었다. 1941년경에 가면 결국 활동이 중지될것을, 이토록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까지 단체의 목숨을 연장시키고 있었다. 이 때 지방 YWCA에서 활약하던 인물 중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제에 소극적이나마 저항하여 사회적 지위에 초연한 태도를 취한 여성들도 있었다. 조선 YWCA를 구상하고 탄생시킨 김필례(金弼禮)가 바로 그러한 인물중의 하나였다. 김활란의 친일활동은 계속되었다. 그는 1939년 이화전문학교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히는 것에 앞장 섰다. 당시 일제는 중등과정의 학생들에게는 강제로 교복을 입게 했지만 전문학생의 경우는 학교의 재량에 이 문제를 맡겨 놓고 있었다. 그런데 부교장이었던 김활란은 언론({동아일보})과 학생.학부모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단체생활상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교복을 입게 하였다. 이것이 학교에서 한복이 사라지게 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매일신보}, 1939. 1. 18, 19)이렇듯 학교의 최종 결정권자인 교장 자리를 맡기 전부터 너무 많은 친일 행위를 했기에 '학교를 살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친일을 했다'라는 정도의 면책조차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되어 김활란이 교장이 된 데에는 약간의 곡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이화고녀, 배재고 등 선교사가 경영하던 학교의 교장이 조선인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상태이기는 했어도 아펜젤러 교장이 물러나는 것에 대해 이사회 내에서 약간의 이견이 있었던 것 같다. 김활란이 교장이 되는 데는 당시 이사였고 선교사 대신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배재교장이 된 신흥우(申興雨)의 힘이 컸다고 한다(최규애, {참다운 크리스챤김활란 여사}, 나랏말 출판사, 1991, 91면). 김활란이 1939년 4월 정식교장이 되면서부터는 일제에게 굴복하면서도 학교를 지킨다는 명분 하나만으로 민족사에서 학교가 해야 할 많은 역할을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야마기 카쓰란이 되어 학병·징병을 권유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지원병제에서 나아가 징용, 징병, 정신대 등의 강제연행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식민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선전하기 위해 각종 친일단체를 결성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까지 앗아가려는 온갖 책동을 다하였다. 여기에 친일 여성단체를 만들고 여성명사들을 동원하는 등 여성들도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김활란은 임전대책협력회 위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등 각종 친일단체의 임원직을 맡았다. 그리고 여성대중에게는 노력동원, 가정의 절약과 저축을 강조하였다.그는 1941년말 야마기 카쓰란(天城活蘭)으로 창씨하였다. 그리고부인궐기촉구 강연, 결전부인대 강연, 방송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정책을미화하고 내선일체·황민화시책을 선전하며 일반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 동원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였다. 확장되는 전선을 일본인 군인으로만 막을 길이 없자 전면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의 남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삼고자 한 결정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감격하였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반도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신시대}, 1942. 12)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은 총후(銃後)는 우리 부녀가 지킬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생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라. 학병 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 12)

그는 후에 자서전 {그 빛속의 작은 생명}에서 일제 때 가장 안타깝고 분하게 여겼던 일 중의 하나가 1943년말 전시비상조치방책으로 이화전문학교가 농촌지도원 연성소가 된 것을 꼽고 있다. 이것은 사실 그가 친일행각을 중단할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때도 이렇게 말하였다.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이번 반도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걸어가야 될 일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참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여성으로서 다시 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매일신보}, 1943.12. 25)

이화전문학교가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연성과로 바뀌어, 기존 학생들에게는 3개월간의 교육을, 신입생에게는 1년간의 교육을 시켜 전조선에 설치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로 배치하여 농촌여성을 계몽한다는 일제의 방침대로 되자, 1944년 이화여전 학생 모집에는 150명 모집에 40명밖에 지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재학생들도 격감하였다. 그리고 제자들과 후배들은 그를 외면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래도 그는 그냥 있었다. 아무리 자기 본심과는 다른 행동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하는 모든 것은 이미 공인으로서의 행동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공인으로서의 책임있는 행동보다는 껍데기뿐인 이화를 잡고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일관했을 뿐이었다. 그가 조선 민족을 향해 내뱉은 그 숱한 반민족적 연설.글.방송을 어떻게 주어 담을 것인가.

이러한 친일적 지식인 여성들의 활동이 대중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들 중 많은 수가 과거 민족운동에 참가하였던 까닭에 일제에 대해 적극적인 투쟁은 커녕 안면몰수한 친일행위는 민중에게 분노와 실망만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지식인들에게는 패배주의를 낳게 했다. 김활란과 같이 교육계에 있었던, 특히 서울의 여학교 교장 ----황신덕*, 송금선, 이숙종, 신봉조, 조동식, 배상명---- 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같은 길을 갔다. 교육계에 종사한 이들의 친일행위는, 어린 학생들에게는 그저 보고 따르는 스승이었기에 악영향은 상대적으로 더욱 큰 것이었다. 김활란의 측근자였던 김옥길의 {김활란 박사 소묘}에서는 그가 1944년경 악성안질에 걸려 실명할 우려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남의 귀한 아들들을 사지(死地)로 나가라고 했으니, 장님이 되어도 억울할 것 없지.……당연한 형벌"이라고 말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 진실로 반성하는 구절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친일한 많은 이들이 자서전이나 전기를 남겼지만 대부분 친일행위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는 것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지도 모르겠다.

반공전선에 서서 활동을 계속

8.15는 우리 민족에게 해방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민족이 분단되고 군정이실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 국가와 사회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고 합법공간에서 각종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런데 남한에서 미군정이 실시되자 어제 '적국영미'(敵國英米)를 외치던 이들이, 이제는 기독교인이며 영어를 구사한다는 장점을 이용하여 미군정 당국자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청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는커녕 항일운동가들을 고문·탄압하던 자들까지 그대로 인수받아 그들에게 권력을 남용할 기회를 주었기에 친일 지식인들의 군정청 접근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이 때 김활란은 이화전문학교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미군정을 열심히 드나들었다. 8·15 직후에는 사회단체 활동에 별로 앞에 나서지 않았지만, 1946년 반탁운동이 고조될 때 그도 우익계열의 독립촉성중앙부인단에 참가하는 등 반탁운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민정 이양시기에 그를 보호하고 그의 지위를 유지시켜 줄 정치세력으로서 이승만을 선택하였다. 일제하에서는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비난하지 못하였으나, 8.15 이후가 되면 냉전논리와 자본주의국가 건설이라는 사회상황에서 이제는 정치이념적으로 자기 색깔을 분명히 하여 반공단체활동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분단을 기정사실화한 제헌의회 선거에 여성의 정치진출을 강조했던 당시 여성계의 입장에서 김활란도 서울 서대문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 대한부인회 대표로서 나온 이 선거에서 낙선은 했지만 그의 정치적 활동은 꾸준히 계속되었고 그의 사회적 지위는 점점 확고하게 자리잡혀 나갔다. 경찰이나 군대·행정기관에 소속되어 직접 항일운동가와 민족성원을 탄압한 이들과는 다르지만, 문화·교육가로서의 역할이 결코 가벼울 수는 없는 만큼 그가 민족사에 남긴 오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반민족적 행위를 범한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전에 이렇다 할 반성의 말 없이 갔고, 현재의 우리는 여성계의 대모로서 그를 인식하고 있다. 역사 교과서에서는 그를 근우회 활동의 중심인물 내지 회장이라고 적어 놓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근우회 활동에서 도중하차했을 뿐이다. 일제에게 굴복하기보다는 죽음을 무릅쓴 투쟁을 한 이보다 어떠한 이유든간에 강자의 압박에 못이겨 굴복한 이를 우리는 더 널리 알고 추앙해야 할 인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이제 이렇게 된 연유에 대해, 그리고 민족적 자존심·긍지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이다.

■ 강정숙(영남대 강사·여성학)

참고문헌

{동아일보}.

{매일신보}.

김활란, {그 빛 속의 작은 생명}, 여원사, 1965.

김옥길, {김활란 박사 소묘}, 이화여대출판부, 1959.

Posted by 에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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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역사 되찾기-친일의 군상(13회) 前이화여대 총장 金活蘭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 때 어찌 여성인들 잠잣코 구경만 할 수가 잇겟습니까. 이 날을 위한 마음의 준비는 이미 벌서부터 되여 잇섯습니다. 내지(일본)학도들과 함께 전문대학 법문계(문과) 반도(조선)학도들은 우렁찬 진군을 이르키어 특별지원병으로서 오는 1월20일에는 영예의 입영을 하게 되엿습니다.이번 반도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거러가야될 길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가지 리유 때문에 참렬을 못하는 것입니다.…아프로는 결전하의 국가목적에 쪼차 한사람이라도 더만히 우수한 지도원을 양성하기에 전력을 다할 각오가 잇슬 뿐입니다."

金活蘭(1899∼1970)이 1943년 12월25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新報)'에 기고한 '男子에게지지 않케 - 皇國女性으로서의 使命을 完遂'라는 제목의 기고문 중 한 대목이다. 일제하 지식인이 신문에 쓴 친일성향의 글 한 두편을 통해 그의 삶 전체를 평가받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거대한 감옥'또는 '노예선'으로 불리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쓴 글이라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 생명에 위협이 있었느냐, 그리고 나중에 자신의 행적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성했느냐 하는 점 등이다. 모든 지식인들에게 지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몇몇 의사.열사가 이에 속할 뿐이다. 그러나 지식인이라면 자신의 과오에 대한 반성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친일 지식인들은 자신의 친일행위를 반성하지 않았다. 친일 지식인들이 더 비난받는 이유중의 하나는 이 때문이다.

일제시대 여성 지식인이었으며 최근 그의 이름을 딴 상(賞)제정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는 김활란은 역사 앞에서 용서받을 수 있을까? 답은 긍정적이지 않은 것 같다. 이유는 그가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따라서 그의 이름을 딴 상 제정은 지식인 사회에서 여러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흔히 김활란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수식어 가운데 하나는 '여성박사 제1호'다. 그는 학사.석사.박사를 따기까지 세 차례에 걸쳐 5년간 미국유학을 했다. 귀국해서는 미국인 선교사 아펜절러(당시 이화여전 교장)의 뒤를 이어 1939년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했다. 굳이 나눈다면 그는 친미(親美)인사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대동아전쟁'이 터지자 친일,반미(反美)인사로 돌변하였다.

'저 흑노(黑奴)해방의 싸움을 성전(聖戰)이라 했고 십자군의 싸움도 성전이라고 했다.…제일선 장병과 보조를 같이 하여 도의를 무시한 물질제일주의의 서양문명을 박차버리고 동아(東亞)의 천지로부터 미영(美英)을 격퇴하여 버리자'. 김활란은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 결성식 (1941.12.27,부민관 대강당)에서 '여성의 무장'이란 주제로 미영 타도를 외쳤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일제하 대부분의 친미.기독교계 인사들(白樂濬.申興雨 등)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다시 친미인사로 변신했다. 그는 미군정 시절 초대 이화여대 총장에 취임했고 이승만정권 하에서 한미(韓美)재단 이사 등을 지냈다.

3.1만세의거 당시 김활란은 이화학당 대학과를 마치고 모교의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 무렵 지하독립운동 조직과 연결돼 활동하고 있었다. '7인의전도대(傳道隊)'를 만들어 기독교 포교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단순한 전도활동 수준을 넘는, 일종의 민족운동이었다. 20년대 후반 좌우 민족진영의 통합으로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자 뒤이어 27년 4월 여성계 민족단체로 근우회(槿友會)가 결성되었다. 그는 근우회 창립멤버로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이듬해 돌연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유학을 떠났다. 31년말 그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농촌교육 관련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 귀국했다. 귀국후 문맹퇴치.봉건잔재 타파 등을 내걸고 농촌운동에 주력하였는데 이는 미국유학을 한 인텔리 여성의 소박한 조국에 대한 헌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의 친일행보는 36년 이화학당 부교장으로 있던 시절 첫걸음을 내딛는다. 그해 말 총독부 사회교육과 주최 '가정의 개선과 부인교화운동의 촉진'을 위한 사회교화간담회에 참석하였다. 37년 1월 그는 총독부 학무국의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를 결성하였고 7월 들어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한일병합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들의 부인들이 주동이 돼 전쟁물자로 바칠 금비녀.가락지를 모으기 위해 결성한 친일 여성단체였다. 이후 여러 친일단체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방송선전협의회,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임전대책협의회,조선교화단체연합회,조선임전보국단,조선언론보국회 등등. 그의 활동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기독교 활동이다. 38년 6월 조선YWCA의 회장으로 있던 그는 "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로 모여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을 자기(自期)하는 의미에서…"(매일신보,38년 6월9일)라며 일본YWCA에 가맹을 발표하였다. 당시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가 학교가 폐교를 당하고 구속자.순교자가 잇따르던 때였다.

39년 4월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한 이후 그의 친일 행각은 본격화되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학교를 지키기 위한 목적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해 김씨인 그의 문중이 본관을 따라 '김해(金海)'로 창씨를 한 것과는 달리 그는 독자적으로 '천성활란(天城活蘭 아마기가쓰란)'으로 창씨개명하였다. '어차피 창씨를 해야한다면 정말 (일본식으로)창씨를해서 자신의 독립된 일가를 세울 생각'이었다.(金貞玉의 저서 '이모님 金活蘭'중에서) '대동아전쟁' 개전(41.12.8) 이후부터는 강연.방송은 물론 가두로 나서서 일제의 침략정책을 미화,선전하였다. 특히 여성들을 대상으로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 등 인력동원에 대한 이해와 협력을 촉구했다. 43년 8월1일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황국신민의 무쌍(無雙)한 영광인 징병제는 드디어 우리에게도 실시되었다.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황공하옵신 성지(聖旨)에 다시금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나라를 위하여 불덩이 같이 끓는 피와 몸을 통털어 바쳐 성은(聖恩)에 보답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렸으며 반도 남아의 의기를 뵈일 기회는 드디어왔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이며 수 천년 역사 이래 모처럼 보는 거룩한 감격…"('매일신보'1943년 8월7일)이라고 썼다.

그는 해방직전 심한 눈병으로 고생하고 있던 자신을 문병차 찾아온 조카(金貞玉 전 이대교수)에게 "남의 소중한 아들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라고 연설을 하고다닌 죄값"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김정옥의 앞의 책 중에서) 당시 여기자 최은희(崔銀喜)는 그를 두고 '모질고 악착한 역경을 맛보지 않고 순풍에 돛단 배처럼 산 행운아'라고 평했다. 식민지 시대와 격동기를 산 지식인의 일생이 대체로 고뇌와 아픔으로 점철됐겠지만 그는 상류층의 한 층을 이루는 생애로 일관하였다. 그가 60년 가까이 이화인(梨花人)으로 살면서 일제하와 건국기에 학교를 지키고 가꾼 공로는 인정할만 하다. 그러나 그를 여성교육계, 나아가 한국여성계의 상징으로 내세우기에는 그의 일생 가운데 '흠결'은 큰 편이다. 이대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그의 친일활동이 적극적이었다. 이대측의 '김활란상' 제정 추진은 그의 업을 기리기 보다는 그의 떳떳하지 못한 삶이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대한매일]

Posted by 에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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