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심판 -현민 유진오 빈소 시위사건

    이번 조선학생의 육군특별지원병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관민이 허다한 인사가 허다한 각도로부터 그 의의를 천명한 바 있었으므로 적격자인 청년학생 제군들은 나 이상으로 이미 이제도의 정신을 알고 있을 것이요, 나 이상으로 심각한 성찰을 하엿을 것으로 믿는다. ... 결국 조선사람의 문제는 조선사람의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천고불마(千古不磨)의 철칙이다. 만일 조선사랆엑 불리한 환경이 있다하면 그환경의 타개자는 조선사람 이외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현하의 최대문제인 내선일체도 또한 그러하다. 내선일체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것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조선인 자신인 것이다. . . . . 병역이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특전이라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용이히 이해될 것이다. . . . 이번 제도에 의해 붓을 던지고 칼을 잡는 사람은 미.영격멸의 군열로 나간다는 이외에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걸음 내디디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번 지원병제도가 형식은 지원이나 실질은 의무와 다름없다는 취지가 이미 철저해진 지금이므로 나는 이번 제도가 반드시 예기의 호성적으로 끝날 것을 확신하는 바이나 나의 이러한 관견이 결의에 직면한 현명한 학생제군에게 다소라도 참고가 된다면 만외의 행인가 한다. (매일신보, 1943.11.19)

해방후 제헌헌법 기초위원, 제헌법학자, 고려대총장, 야당총재, 신군부의 국정자문위원을 지낸 현민 유진호(1906~1987, 서울)가 매일신보에 기고한 학병지원권유 기고문이다. 경성제대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조선문인협회' 발기인, '조선문인보국회', '총력연맹', '결전(決戰)소설' 심사위원, 각종 시국강연과 대동아공영권과 노래한 그가 걸어온 해방후의 길은 너무나 영광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1987년 8월 30일 세상을 떠나며 마지막 가는 길은 비참하기 까지 했다. 32년 강사를 시작으로 52년 9월 제2대 총장으로 취임한 후 14년간 2, 3, 4대 총장을 지낸 고려대에 사회장으로 빈소를 차리자 교수들은 빈소 철거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9월 1일에는 학생 200여명이 연좌농성에 들어가고 9월7일에는 교수들이 ". . . . . 우리는 죽은사람에 대해 대체로 너그러운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행과 통념이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는 한 그것은 물론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 . . 오늘날 일제 잔재와 독재세력 및 그 협력자들은 각종하수인들을 동원하여 온갖 술책으로 민족정기를 어지럽히고 온 국민의 열망인 민주화마저 방해하고 있다. 우리의 항의행위는 고대정신과 명예를 수호하고 나아가서는 민족정기를 진작시키며, 민주사회를 확립시키기 위한 것이므로 .. . . . "라는 성명을 발표 했다. 민족을 배반하고 제자를 전쟁터로 내몰았지만 사죄한마디 없이 살다간 현민은 가장 위안을 받아야 할 곳에서 치욕을 당하며 마지막길을 떠났다.

이화여대와 김활란 - 김활란의 유언에 따라 대강당에서 이화여대 합창단의 '할렐루야'합창으로 환송고별식으로 추모식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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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우회

참고자료 2006. 5. 27. 12:35

근우회(槿友會)

근우회는 일제 아래서 활동한 대표적인 여성운동단체로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인사로 구성 되었다. 근우회의 결성에 '신간회'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는데 신간회는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세력등 모든 반일세력을 포함하는 연합단체였다. 근우회 결성 초기엔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의 구성에 문제가 없었으나 전국에 지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지회 대표를 사회주의 계열이 많이 차지하였다. 당시 중앙 임원은 지회 대표가 뽑았기 때문에 사회주의계열의 중앙집행위원이 월등하게 많아졌다. 근우회의 목표는 여성의 사회적 차별을 없애고 여성의 권익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독립을 먼저 이루어야 했고 반일투쟁으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내부 민족주의계의 방해와 일제의 탄압이 이어졌다.

그후 민족주의계인 김활란은 1928년 근우회를 아무런 변명도 없이 탈퇴한다. 그리고 1929년 근우회의 기관지인 『근우』에 "사상적으로 통일시키려는 것은 자연법칙에 위반되는 것이다.","조직과 기관에만 너무 얽매이지 말고 그것을 떠나 개인적으로 교양 사업에 주력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후 김활란은 다른 단체를 결성하는 등 열성적인 활동을 계속한다.

창립대회

창립취지

분산되어 있전 조선의 부인운동으로 효과를 충분히 방휘하지 못하였던 바 조선자매 전체의 역량을 단결하여 운동을 전반적으로 전개하기 위함

강령

조선여자의 공고한 단결을 도모함
조선여자의 지위향상을 도모함

행동강령

①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 일체 차별 철폐
②일체 봉건적 인습과 미신타파
③조혼 폐지 및 결혼의 자유
④인신매매 및 공창 폐지
⑤농촌 부인의 경제적 이익 옹호
⑥부인노동의 임금차별 철폐 및 산전산후 임금 지불
⑦부인 소년공의 위험노동 및 야업 폐지

선언

조선 여성을 불리하게 하는 각종 불합리는 그 본질에 있어 조선사회 전체를 괴롭게 하는 그것과 연락된 것이므로 여성 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분투하는 것은,동시에 조선사회 전체를 위하여 나아가서는 세계인구 전체를 위하여 분투하는 행동이 되도록 한다. 여성 따로의 조직을 결성하는 것은 조선 여성의 특수점을 고려한 것이다.

전국대회 1928년

표어

조선여성은 민족운동의 유력한 부대로 되자
전민족의 생존권을 확보하자
조선 민족운동의통일전선을 굳게 결성하자
신간회를 적극적으로지지하자
전쟁의 반대>

행동강령

①여성에 대한 사회적 법률적 인식차별 철폐
②봉건적 인습과 미신타파 그리고조혼.강제혼.매매혼금지
③부인노동자의 임금차별 철폐 및 산전산후 임금지급
④부인 및 소년노동자의 위험노동 및 야간작업 폐지
⑤노동자.농민 의료기관 및 탁아소 제정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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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활란의 형부 - 밀정 김달하와 '우월'

김활란의 언니 애란이 이화학당에 다닐 무렵 상처한 김달하의 청혼이 들어왔다. 당시 김달하는 두 번의 상처를 하고 5명의 아들이 있었다. 평북 의주 태생인 김달하는 서북학회에서 활동하기도 하였고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던중 1915년 총독부 밀정으로 북경에 이주를 한다. 1922년 5월 '세계기독학생연합회'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에 온 김활란은 김달하의 집에 묵게 되는데 당시 상황과 '우월'이란 호를 짓는 과정을 '이모님 김활란'에 김정옥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모님이 북경에 오셨을 때 나(김정옥)는 열한 살이었다. 북경의 우리집은 어느날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헬렌이 나라 대표로 여기 온대요. 오래는 못있고 두 주일쯤 있는다는데 우선 회의 장소인 청화대학교 기숙사에 머물다가 회의가 끝나는 대로 우리집에 와서 며칠 묵겠대요"
    나는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이렇게 반가운 소식을 전하는 것을 들었다. 세 살 때 한국을 떠났던 나는 이모님을 기억하지 못했으므로 그때 처음으로 이모님을 대하는 셈이었다. . . . . .
    "또 달이로구나" 만나보시자 나온 첫 말씀이었다. 그날밤 아버지는 어머니에기 이렇게 말씀하셨다.
    "처제를 오랜만에 만나니 정말 더 좋아졌군. 학식이 몸에 배었고 인품이 깨끗하게 닦아졌소. 밤하늘의 보름달처럼 앞으로 처제의 빛이 이 나라와 많은 사람들에게 비춰질 거요. 나는 장래가 밝은 처제에게 '우월'(又月)이란 아호를 지어주겠소. 하늘에 달이 있듯이 이땅에도 또 달이 있다는 뜻으로 말이오." 이래서 이모님은 북경여행 기념으로 '우월'이란 호를 갖게 되었고 이 아호를 소중히 알고 평생쓰셨다.

북경에서 김달하는 밀정짓을 하는 대가로 받는 생활비로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하던 망명객들과는 달리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김달하가 총독부의 지령을 받는 밀정이라는 소문이 무성하던 무렵 김달하가 심산 김창숙선생을 찾아 왔다.
"앞날을 생각하면 조선독립도 참 막연하지요. 이국에서 고초만 겪어야 하니 딱하지 않습니까?"
"고생이야 각오를 한 것, 혁명가의 본색이 아니겠오?"
"그게 아닙니다. 선생 생전에 독립이 안될 것은 뻔한 노릇이예요. 고생하느니 귀국해서 안락한 가정을 누리시는게 어떨까요? 하도 딱해보여서 제가 총독부에 사전교섭을 했습니다. 경학원 부제학 자리를 비워 놓고 기다리는 중이니 귀국을 하시지요?"
김달하는 1925년 3월 30일 '다물단'(多勿團)원에게 피살되어 아궁이에 처박히는 종말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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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선생 암살과 김활란 - 안두희 육성고백 녹취

아래 녹취는 김구선생 시해 행위를 안두희 스스로가 고백한 육성녹음 테이프로서 한국전쟁 당시 부산 정치시절 안두희가 지적한 김활란 부분을 녹취한 것이다. 김활란은 공보처장 전시국민홍보외교동맹위원장, 안두희는 부산계엄분소 현역대위, 신성모는국방장관이었다.

    이 테이프는 민간 차원에서 구성된 "백범 김구선생 암살진상 규명위원회" (위원장 이강훈)가 1993년 2월 17일 국회'법제사법위원회'의 '법제소위원회'에 구성된 "백범 김구선생 암살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강신옥의원)에 자료로 제출한 내용이다.

    테이프 내용 해설 : 다음은 안두희가 특별 사면으로 풀려난 후 신성모 국방장관이 안두희를 은밀히 불러 수고 많았다며 돈을 줬다는 내용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신성모 국방장관이 돈을 준 곳은 김활란 당시 이화여자대학장의 서재였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신성모는 안두희를 포병으로 원대복귀 시켜 줄 것도 약속합니다.

    안두희 육성 : 한번은 "안 대위님 전화가 왔습니다." 해서 받아보니깐, "나 이화여대학장 인데요."그래서 "왜요?" 하고 깜짝 놀랐습니다."예, 알겠습니다 . 김활란 박사 아닙니까? " 그랬더니 "그래요" 라고 하여, "그런데 여기 지금 국방부장관이 내 서재에 와있습니다.오랜간만에 부산에 내려오셨다가 내 서재에 오셔서 이 얘기 저 얘기 하시다가 안 대위님이 계엄사령부에 계시다는 말을 누구한테 들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번 만나보면 좋겠다고 그러시는데 시간이 과히 바쁘지 않으면 한 번 오십시오. 지금 여기 계십니다." 그러는 거예요. 뭐 또 거리가 얼마 멀지 않은데 있어서 "예, 가겠습니다 ." 하고서 지프차를 타고 거기까지 갔습니다. 국방부 장관까지 있다고 그래서 이 근방에다 지프차 세우지 말고 저기 갔다가 세우라고 하고 들어가서 김활란 박사한테 인사하고 보니깐 또 저쪽에 비쩍 말라 가지고 북어 대가리 같은 신성모가 앉았더구만요. 그래서 고래고래 소리지르지 않고 간단히 경례만 하고 "안두희를 부름 받아 왔습니다." 했더니 "앉아" 해서 앉았지요. 신성모는 "지금 소속이 어디지? " 하기에 "정보부에서 일하라고 해서 갔더니 , 나도 모르는 곳에 전송 돼와서 지금 계엄사령부 임시계엄부원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수고 많았다면서 하더니 주머니에서 계면쩍은 자세로 봉투를 내미는 거예요. "빈약하지만 그동안 수고했는데 그저 용돈이나 쓰시오. 그러구 원래 포병이니깐 포병으로 돌려줄까?" "예, 저는 원대가 포병이니까 포병으로 돌려주었으면 합니다." 그러고서 가만히 있었더니, 받기를 기대하면서 집어주는 것을 뻔히 알 거 아니예요? 그래서 안받기도 뭣하고 받기도 뭣하고 또 저 켠에서는 김활란 박사가 이 쪽에 관심이 없는 척 하면서도 대화가 벌어지고 있으니까 관심을 가지고 받나 안 받나 그것 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더라고요. 봉투를 잡았더니 그제서야 손을 잡대요. 신성모가 "잘해 봐" 해서 나는 경례하고 나와 이쪽 문 근방에서 김활란 박사한테 인사하고 "또 한번 오겠습니다." 하고 경례하고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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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

참고자료 2006. 5. 27. 12:34

창씨개명 創氏改名

1940년 2월 11일 실시한 제령 제 19호 '조선민사령중 개정 건'은 '창씨'를 규정하고 제령 제 20호 '조선인의 씨명에 관한 건'은 '개씨,개명'을 강제하기 위한 것으로 창씨와 개명을 통해 진정한 천황의 적자가 되어야 한다는 황국 신민화정책의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조선징병제' 시행을 위한 준비작업이기도 했던 창씨개명은 이름을 죽음보다 중요시한 우리민족에겐 무엇보다 가혹한 탄압이었다. 새로 부임하는 지방명에 조상의 이름자가 들어 있다는 이유로 부임을 포기했던 이들은 창씨개명을 죽음으로 맞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는 창씨개명에 앞장서기도 했으며 창씨의 명분을 교묘한 글솜씨로 표현 하기도 하였다.

김활란의 창씨개명 - 「이모님 김활란」 중 김정옥지음

    1940년부터 일본은 창씨를 강요해 왔다. 많은 사람들이 갖은 핑계를 만들어 이것을 피했으나 단체나 기관의 책임자들에게는 솔선수범이 강요되었다. 이모님은 '김해 김씨'였는데 친척들은 창씨를 한다면 '김해'의 본관을 따르자는 의견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모님은 어차피 창씨를 해야 한다면 정말 창씨를 해서 자신의 독립된 일가를 세울 생각이었다. 이래서 '천성'(天城)을 선택했다. 찬송가에도 '천성을 향해 가는 모든 신도'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천성활란'(天城活蘭)시절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이광수의 창씨개명 향산광랑(香山光郞) - '선씨고심담'(選氏苦心談)과 '창씨와 나'를 매일신보에 발표

선씨고심담(選氏苦心談) 1940.1.5

    지금으로부터 2천6백년전 진무천황께옵서 어즉위(御卽位)를 하신 곳이 가시와라인데, 이곳에 있는산이 향구산(香久山,가구야마)입니다. 뜻 깊은 이 산 이름을 씨로 삼어 '향산'(香山)이라 한 것인데, 그 밑에다 '광수'의 '광'(光)자를 붙이고 '수'(洙)자는 내지식의 '랑'(郞)으로 고치어 '향산광랑'(香山光郞)이라고 한 것입니다.

창씨와 나 1940.2.20

    창씨의 동기

    내가 향산(香山)이라는 씨를 창설하고 광랑(光郞)이라는 일본식이름으로 고친동기는 황공하고도 위대하신 천황의 이름과 '읽는 법'이 같은 씨명을 가지려고 한데서 부터다. 나는 깊이 깊이 나의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생각한 끝에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臣民)이다. 나의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일지라도 천황의 신민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향상광랑(香山光郞)이 보다 천황의 신민으로서 어울린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내선일체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허락했다. 내선일체 운동을 (적극적으로) 해야 될 사람은 조선인 자신이다. 조선인이 내지인과 차별이 없어지는 것 이외에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따라서 차별을 제거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하자는 것 이외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성명 석자를 고치는 것이 그 노력중의 하나라면 (나는) 어떤 미련도 없다.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나는 이같은 신념에서 향산(香山이라는 씨를 창설한 것이다.

    편의

    이제부터 서서희 조선인의 씨명을 국어(일본어)로 부를 기회가 많아질 것이다. 그러한 때 '이광수'보다 '향산광랑'(香山光郞)이 훨씬 편리하다. 또 만주나 토쿄, 오사카 등에 살고 잇는 동포가 일본식 이름을 가진 것은 실생활은 물론 그 위에 많은 편리를 가질 것이다.

    결심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재래의 성명은 지나(중국)를 숭배한 선조들의 유물이다. 영랑, 술랑, 관창랑, 초랑, 소회, 이종, 거칠부, 흑치와 같은 이름들은 고대 우리 선조들의 이름이었다....... 이미 우리는 일본제국의 신민이다. 지나인과 혼동될 성명을 가지는 것보다는 자연스런 것이라고 믿는다. 거기서 나는 일본인이 될 결심으로 씨를 '향산'(香山)으로 하고 명을 '광랑'(光郞)으로 한 것이다. 나의 처자도 따라서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했다. 이것도 충성의 일단으로 믿기 때문이다.

    정치적 영향

    금년 8월 10일까지로 조선인의 창씨 기한이 끝난다. 그날의 결과는 정치적으로 커다란 영향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즉 일본식 씨를 조선인 전부가 창설한다면 그것은 조선인 2천4백만이 진실로 황민화할 각오로 임했다는 중대한 추정자료가 될 것이다. 만일 그에 반해 일본식 씨를 창설한 자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행한 쪽의 추정자료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가 조선인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사실은 조선인 자신의 행불행(幸不幸)에 커다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런고로 일본식 씨를 창설하는 것은 일종의 정치운동이라고 나는 믿는다.

Posted by 에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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